‘에너지 빈국’ 대한민국의 착각 [편집장 레터]
이젠 돈 있어도 에너지 못 사…구태의연해도 절약이 답
시멘트 관련 기업 임원이 최근 공문을 하나 보여주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제목은 ‘제품 제한 출하 발생 가능성에 대한 통지’입니다. 한마디로 ‘제때 공급 못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중동 전쟁으로 유가가 크게 올랐고 주원료인 나프타 값이 뛰어 수급이 꼬였습니다. 공문을 보낸 협회는 ‘불가항력적 사유’라고 덧붙였습니다. 요즘 ‘불가항력’이라는 용어가 자주 들립니다. 카타르는 한국과의 장기 LNG 공급계약에 대해 불가항력을 선언했죠. 전쟁이나 천재지변 등 통제 불가능한 사태로 계약을 정상적으로 이행할 수 없을 때, 법적 책임을 피하려 고지하는 겁니다.
이쯤에서 우리가 잊고 지냈던 문장 하나 꺼내려 합니다. 제가 어릴 적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말입니다. ‘한국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다.’
1970년대 전 세계는 두 차례의 석유 파동을 겪었습니다. 당시 정부 구호가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 근검절약으로 이겨내자’였습니다. 1976년 포항 영일만에서 석유 발굴 해프닝이 있었죠. 이때 박 전 대통령은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석유가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며 탄식했습니다. 한국은 에너지 94%를 수입하는 ‘에너지 빈국(貧國)’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단한 산유국 국민이라도 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한국은 세계 8위 에너지 소비 국가입니다. 1인당 소비량은 OECD 평균 1.7배입니다. 에너지 효율성은 전 세계 최하위권이고요.
여름철 명동 거리를 나서면 문을 활짝 열어놓은 매장에서 에어컨 바람이 펑펑 쏟아집니다. 여의도 사무실에선 겨울철 실내 온도를 한껏 올려놓고 반팔로 지냅니다. 온도를 1도만 낮춰도 에너지 소비를 7% 줄일 수 있는데 말이죠.
각종 자원 낭비도 도를 넘었습니다. 새벽배송이 일상 속으로 파고들며 종이박스, 스티로폼 등 쓰레기가 크게 늘었습니다. ‘패스트패션’이라는 용어가 말해주듯, 옷조차 일회용처럼 사용합니다. 면 티셔츠 한 장 만드는 데 필요한 물이 한 사람이 2~3년을 마실 양(2700ℓ)입니다. 옷 한 벌 사는 걸 허투루 생각하면 안 되는 이유죠. 친환경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낭비도 불편합니다. 비닐봉지와 플라스틱을 줄이겠다며 만든 에코백이 집에 쌓여 있지 않나요? 면 가방이 비닐봉지를 대신해 환경에 기여하려면 수천 번 써야 합니다. 에코백이 마케팅 도구로 변질됐죠. 이처럼 우리는 편리함과 무심함 속에 ‘흥청망청’ 살고 있습니다.
이번 중동 전쟁은 바닷길을 따라 뭐든 가질 수 있다는 교만에 경종을 울렸습니다. 매경이코노미는 이번 에너지 위기를 ‘슈퍼 트릴레마(Super Trilemma: 다중 딜레마)’로 정의 내렸습니다.
해법은 절약 뿐입니다. 구태의연해보여 다른 방안을 찾아봤는데 딱히 없습니다. 정부가 자동차 5부제를 시행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이제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라는 잊었던 현실을 다시 한 번 직시할 수밖에요. 그나마 한국전력의 대규모 누적 적자에도 정부가 전기료를 대차게 올리지 않는다는 점을 위안 삼아야겠습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53호(2026.04.01~04.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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