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만에 생산 종료" 싱가포르 국민 맥주 덮친 파도 [이봉렬 in 싱가포르]

이봉렬 2026. 3. 27.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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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렬 in 싱가포르] 탄소중립 달성 안되면 공장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시대

[이봉렬 기자]

싱가포르의 편의점이나 호커센터(야외 푸드코트)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파란 라벨의 타이거 맥주는 싱가포르의 자부심이자 정체성을 상징하는 국민 맥주입니다. 20년 전 싱가포르에 처음 왔을 때, 적도의 덥고 습한 공기 속에서 일과를 마친 저에게 얼음처럼 차가운 타이거 맥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로였습니다.

타이거 맥주의 역사는 19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싱가포르 현지 기업 프레이저 앤 니브
(F&N)와 네덜란드의 하이네켄이 합작해 말라얀 브루어리(현 아시아 퍼시픽 브루어리)를 설립하며 싱가포르의 첫 현지산 라거 맥주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당시 기술로는 열대 지방에서 맥주를 양조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지만, 타이거 맥주는 특유의 청량감으로 싱가포르의 열기를 식혀주는 유일한 해법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전 세계 60개국 이상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최근 하이네켄은 싱가포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보도자료를 발표했습니다.
 지난 24일 아시아 퍼시픽 브루어리(하이네켄 아시아 태평양)의 보도자료(왼쪽)와 이를 보도한 25일 자 <스트레이츠 타임스> 기사.
ⓒ 아시아퍼시픽브루어리/스트레이츠타임스
"하이네켄은 물류, 혁신 및 인공지능 역량의 지역 허브로서 싱가포르 내 입지를 강화할 예정이다."

보도자료 제목만 보면 대규모 신규 투자를 단행할 것 같지만, 현지 유력 일간지 <스트레이츠 타임스>는 이 이면을 꿰뚫는 전혀 다른 제목을 뽑았습니다.

"마지막 잔: 타이거 맥주, 96년 만에 싱가포르 생산 종료"

하이네켄은 실제로는 양조장을 폐쇄하고 영업·관리 기능만 남기겠다는 결정을 지역 허브 강화라는 화려한 수사로 포장한 것입니다. 기업의 말장난에 속지 않고 핵심을 보도한 현지 언론의 모습은, 보도자료를 그대로 베껴 쓰기에 급급한 우리 언론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싱가포르의 영혼을 담았다는 타이거 맥주가 고향을 떠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인건비 절감 차원이 아닙니다. 바로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양조장을 덮친 것입니다.

하이네켄의 에버그린(EverGreen) 2030 전략은 2030년까지 전 세계 생산 시설에서, 2040년까지 공급망 전체에서 탄소중립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좁은 국토로 인해 대규모 재생에너지 확보가 어렵고 물류 효율성이 떨어지는 싱가포르의 소규모 공장은 이 목표 달성에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결국 90년이 넘는 역사보다 탄소중립이라는 시대적 과제가 우선시된 결과입니다.

국가 경쟁력 결정짓는 실질적 잣대, 탄소중립
 하이네켄의 에버그린2030전략. 보다 나은 세상을 양조하기 위해 맥주를 만들 때 재생에너지만 사용하겠다고 합니다.
ⓒ 하이네켄
맥주 회사가 왜 이토록 탄소중립에 필사적일까요? 여기에는 세 가지 절박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탄소 규제가 곧 비용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에 본사를 둔 하이네켄은 전 세계적인 탄소세 도입과 환경 규제 강화라는 파도 앞에 서 있습니다. 탄소를 많이 배출하며 맥주를 만드는 것은 앞으로 막대한 세금과 페널티를 의미합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탄소중립을 달성하지 못하면 수익성 자체가 무너지는 구조가 되고 있습니다.

둘째, 기후 위기가 원재료 공급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맥주의 핵심 원료인 보리와 홉은 기후 변화에 매우 민감한 작물입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가뭄과 이상 기후는 원재료 가격 폭등으로 이어집니다. 하이네켄에 탄소중립은 환경 보호라는 도덕적 구호를 넘어, 맥주를 계속 만들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한 생존 투쟁입니다.

셋째, 가치 소비를 중시하는 젊은 층의 외면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의 소비자들은 환경에 해를 끼치는 기업의 제품을 사지 않습니다. 하이네켄은 탄소중립을 통해 지구를 생각하는 맥주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함으로써 미래 시장의 주역인 MZ(밀레니얼+Z세대)세대와의 연결 고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전략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

타이거 맥주의 사례는 우리에게 엄중한 경고를 던집니다. 탄소중립은 더 이상 구호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결정짓는 실질적인 잣대입니다. 탄소를 배출하며 만든 제품은 시장에서 팔릴 수 없고, 그런 공장은 투자조차 받을 수 없는 세상이 오고 있습니다.

현재 용인에 조성 중인 반도체 산업단지는 필요한 전력을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을 통해 조달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재생에너지로 만든 맥주가 아니면 마시지 않는 시대에 재생에너지로 만든 반도체가 아니라면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과연 사 줄까요?

싱가포르에서는 맥주 양조장이 문을 닫았지만, 한국에서는 반도체 팹이 문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 반도체 산단을 구축하는 등 선제적인 대비만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정부와 기업의 빠른 결단을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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