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 광화문 공연의 상반된 평가, 그 속에서 읽어야 할 것
[이규승 기자]
지난 21일 저녁, 나는 아이들과 함께 TV 앞에 앉아 있었다. 초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이 나란히 앉아 카운트다운 화면을 바라보면서.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수록 공연 바깥의 소문도 함께 부풀었다. 엄청난 이벤트가 있을 거라는, '아리랑'이라는 제목에 걸맞은 어떤 선언이 나올 거라는, BTS쯤 되면 이번엔 역사적인 한 장면을 보여줄지 모른다는 예감이 있었다. 왜 그런 기대를 했을까. 아마 BTS라는 이름이 한때 유엔 연설장에서도 시대의 언어를 꺼내 들었던 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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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TS(방탄소년단)가 지난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컴백 공연 ‘비티에스 컴백 라이브 : 아리랑’에서 신곡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
| ⓒ 사진공동취재단 |
"엄청 세련됐는데, 내가 상상한 아리랑은 아니네."
"조금 더 강한 한 방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대화는 사실 우리 집만의 대화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번 공연을 둘러싼 논쟁이 거세게 번진 것도 결국 비슷한 감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이들은 BTS의 귀환 그 자체를 축제로 받아들였다. 또 어떤 이들은 광화문이라는 상징 공간이 거대 플랫폼 속에서 얼마나 빈약하게 소비되었는지를 문제 삼았다. 누구는 음악의 완성도를 보았는데, 누구는 장소의 쓰임새를 신경썼다. 누구는 팬의 감격으로 보았고, 누구는 공공성의 관점에서 비판했다.
이 상반된 반응을 두고 한쪽을 무지하다 하고, 다른 한쪽을 꼰대라 부르는 건 손쉬운 일이다. 하지만 문화는 원래 그렇게 단순하게 가르마를 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BTS 공연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들
첫째, 무대 바깥의 논란부터 보자. 광화문광장을 내어준 정부와 서울시는 관람객 규모를 크게 잡고 안전 통제에 들어갔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정도까지 해야 하냐?"라는 인상을 받았단다. 실제 체감 인파는 예고된 수치보다 훨씬 못 미쳤고, 그에 비해 통제는 생각보다 강했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행정의 입장을 마냥 손가락질하기도 어렵다.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 그 이후 대형 군중 이벤트에서 국가와 지자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기준은 흥행이 아니라 무사고다.
그래서 이번 대응을 두고 과잉이었다고만 단언하는 것도, 불가피했다고만 주장하는 것도 모두 절반의 진실이다. 시민이 느낀 불편도 사실이고, 국가가 감당해야 할 공포도 사실이었다. 문제는 이 둘 사이를 어떻게 설득의 언어로 메우느냐에 있다. 통제는 했는데 설명은 부족했고, 광장을 썼는데 사유가 충분히 공유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둘째, 넷플릭스 독점 중계에 대한 아쉬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광장을 내주었지만, 정작 세계가 본 것은 광화문인지 (검은 배경에 빨간 'N'이 형상화된) 넷플릭스인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그날 화면 속 광화문은 살아 있는 장소라기보다 거대한 배경처럼 소비된 측면이 있었다.
국가를 상징하는 공간의 선과 면, 경복궁과 세종대로가 품고 있는 시간의 깊이는 화면 안에서 좀처럼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무대의 형상과 카메라의 호흡은 너무 익숙하게 글로벌 플랫폼의 문법에 맞춰 복무했다. 마치 광화문이 넷플릭스를 위해 비워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도 느껴졌다. 그 장면을 보고 허탈함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것은 공연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광장의 얼굴이 너무 쉽게 지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 예술 감독을 둘러싼 이야기도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세계적인 연출자를 초빙했다는 사실은 홍보 포인트가 될 수 있지만, 연출은 혼자 예술적 이상을 실현하는 자리가 아니다. 특히 이런 프로젝트에서는 누가 비용을 대고, 송출권을 쥐고, 최종 노출 화면을 통제하느냐가 미학의 방향을 좌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연출자 개인의 역량만 말할 것이 아니라, 왜 이런 구조에서는 장소의 상징성보다 플랫폼의 브랜드 정체성이 더 선명하게 남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넷째, 가장 중요한 음악 이야기도 해보자. 나는 이번 무대와 앨범을 보며 좋다, 나쁘다의 평면적인 감상에 앞서 "미국 시장을 향해 심장을 쏘는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세련됐고, 글로벌 팝의 질감에 충실하며, 흠잡기 어려울 만큼 잘 만들어진 트랙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어떤 세대는 멈칫한다. '아리랑'이라는 단어가 자아낸 기대, 광화문이라는 장소가 던진 암시와 실제 음악의 결이 어긋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쩌면 좀 더 강렬한 한국적 비틀기, 좀 더 선명한 메시지를 기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매우 공들여 빚은 '메가 팝'의 결과물이었다.
그렇다고 그 음악을 향해 손쉽게 "정체성이 없다"거나 "서구 취향만 쫓았다"고 재단할 수 있을까. 세대는 늘 자기 귀의 익숙함으로 새 음악을 판단해왔다. 이미 50대에 접어든 우리 세대만 돌아봐도 그렇다. 한때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했을 때를 기억하는가. 당시의 어른들이 그 음악을 소음이라 마음껏 짓누르지 않았나. 가사가 어쩌니, 춤이 어쩌니, 청소년을 망친다느니 하며 던졌던 돌멩이들이 언론의 곳곳을 낭자했다.
그러나 후세에 한국 대중음악은 서태지 이전과 이후로 나뉘고 있다고 평가한다. 지금 우리가 어떤 젊은 세대의 음악을 듣고 "왜 이렇게 미국적이냐"고 묻는 순간에도, 어쩌면 똑같은 반복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이해하지 못하는 감각 앞에서 기성세대는 늘 자기 시대의 바로미터를 꺼내 들기 때문이다.
BTS 공연을 둘러싼 성패에 관한 목소리
이번 BTS 공연을 둘러싼 상반된 평가를 두고 누가 맞느냐를 겨루는 일은 그리 생산적이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거대한 문화적 사건이 왜 이렇게 서로 다른 층위의 감정을 동시에 건드렸는가를 읽는 일이다. 팬은 기뻐할 권리가 있다. 비평가는 따질 권리가 있다. 시민은 공공 장소의 쓰임을 질문할 권리가 있다. 부모 세대는 아이들과 함께 보며 낯섦을 토론할 권리가 있다. 문화는 본래 만장일치로 완성되지 않는다. 논쟁과 어긋남 속에서 서로의 감각이 부딪히는 틈에서 자란다.
이번 공연이 보여준 가장 중요한 장면은 어쩌면 무대 위가 아니라 무대 이후였는지도 모른다. 한쪽에서는 "역시 BTS"를 외쳤고, 다른 한쪽에서는 "왜 광화문인지"를 물었다. 이 질문이 동시에 살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모두 박수만 치는 사회보다 서로 다른 이유로 논쟁이 많아지는 사회가 오히려 문화적으로는 건강하다. 즉, 환호나 비평만 있는 곳에서도 다음은 없다. 둘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한 번의 사건이 다음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날 TV 앞에서 공연이 끝난 뒤 아이들이 말했다.
"그래도 BTS는 BTS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 뒤에 한 문장을 덧붙이고 싶었다.
"그래도 광화문은 광화문이어야 했는데..."
아마 이번 공연을 둘러싼 모든 논쟁은 그 두 문장 사이에 놓여 있을 것이다. 세계적 그룹의 귀환과 국가 상징 공간의 공공성. 플랫폼의 완성도와 장소의 얼굴. 팬의 열광과 시민의 질문. 우리는 그 사이를 성급하게 한쪽으로 정리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 사이를 오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문화는 바로 그 틈에서 다음 말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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