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소음 뚝, 제주의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보세요

전갑남 2026. 3. 27.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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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봄 기행 9] 제주도의 깊은 뿌리를 찾아... 탐라 시초의 역사가 서린 삼성혈

3월 3일부터 3월 9일까지 제주를 여행했다. <기자말>

[전갑남 기자]

제주도의 깊은 뿌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 육지와는 결이 다른 독자적 문명이었던 탐라(耽羅)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대개 제주라 하면 푸른 바다나 점점이 박힌 오름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제주 도심에서의 여행 목적지는 탐라의 시초가 잠든 신비로운 성소, 삼성혈(三姓穴)로 정했다.
 탐라국의 시작을 알리는 '탐라국발상지' 비석과 돌하르방, 그리고 홍살문이 성역의 입구임을 알려준다.
ⓒ 전갑남
입구에 들어서자 '탐라국발상지(耽羅國發祥地)'라 새겨진 거대한 비석과 위엄 있는 홍살문이 이곳이 예사롭지 않은 성역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역사와는 또 다른 궤적을 그리며 바다 위 독자적인 왕국을 일궜던 그 태초의 시간을 만나러 가는 길은 내게 조금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제주의 숨결을 고쳐 쓰다

본격적인 삼성혈 탐방을 앞두고 채비를 서두르자, 곁에서 짐을 챙기던 아내가 불쑥 한마디를 건넸다.

"여보, 생각해보니 우리 어머니께서 제주 고씨 아니셨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손길을 멈췄다. 이내 무릎을 탁 쳤다.

"그렇지! 어떻게 수십 년 전 하늘나라로 가신 시어머니의 뿌리를 그리 정확히 기억해주네. 고맙게도..."

아내의 따뜻한 기억력 덕분에 이번 발걸음은 단순한 관광을 넘어 어머니의 유전적 궤적을 쫓는 사적인 탐색이 되었다. 제주 고씨의 발원지로 향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자, 익숙했던 제주의 바람조차 사뭇 다르게 살을 파고들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스치듯 배웠던 탐라국은 생각보다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기원전 1세기경 성읍 국가의 기틀을 갖춘 탐라는 백제, 고구려, 신라와 대등하게 교류하며 바다 너머 독자적인 왕국으로서 위엄을 떨쳤다.

고려 숙종 10년(1105년)에 '탐라군'으로 개편되며 행정 구역 상 편입되었고,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이르러 왕자(王子)와 도주(島주)라는 지위가 공식적으로 폐지됨으로써 약 15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탐라'라는 국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이름은 지워졌어도 그들의 정신은 여전히 이 섬 곳곳에 맥맥히 흐르고 있다.

고목이 허리 굽혀 경배하는 곳

삼성혈은 제주시의 번화한 빌딩 숲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담장 밖은 자동차 경적과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웠으나, 입구를 지나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온 듯 공기부터 서늘하고 정숙하게 바뀌었다. 빽빽하게 들어선 고목들이 외부의 소음을 완벽히 차단하는 천연의 성벽이 되어주고 있었다.

안내판을 유심히 살펴보던 아내가 "삼성혈도 국가에서 관리하는 공식적인 유적인가요?"라고 물었다. 나는 이곳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34호로 지정되어 보호 받는, 제주의 독자적인 형성 과정을 증명하는 소중한 유산임을 찬찬히 일러주었다.

수백 년 된 곰솔과 팽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진 '장수의 숲길'을 아내와 함께 천천히 걸었다. 도심의 소음 대신 새소리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맑아지며 진정한 '쉼'의 감각이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석주(石柱)들이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는 삼성혈의 핵심, 세 개의 구멍. 앙상한 고목 가지 사이로 신비로움이 배어 나온다.
ⓒ 전갑남
 '삼성혈'이라 새겨진 비석과 세 신인의 용출지를 상징하는 세 개의 구멍. 빗물도 고이지 않는다는 신비로운 곳이다.
ⓒ 전갑남
숲길 끝에서 마주한 삼성혈 중심에는 세 신인의 발원지임을 알리는 비석이 서 있고, 그 주변으로 신비로운 세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특히 수백 년 된 녹나무와 곰솔들이 마치 거대한 수호신처럼 혈(穴)을 둘러싸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모든 가지가 안쪽 구멍을 향해 팔을 뻗듯 굽어 있었다. 거대한 고목들이 지면의 세 구멍을 향해 경배하듯 가지를 낮게 숙이고 있는 풍경은 경외심마저 불러일으켰다.

하늘이 아닌 땅에서 시작된 이야기

세 개의 구멍을 뒤로 하고 발길을 옮기자 기와지붕의 삼성전(三聖殿)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세 신인(神人)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제를 올리는 성스러운 공간이다. 우리가 다가갔을 때 삼성전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삼성문(三聖門)' 너머로 매년 제를 올리는 삼성전(三聖殿)의 전경과 향로가 경건함을 자아낸다.
ⓒ 전갑남
문 틈을 살피던 아내는 "당신 어머니의 조상님들이 계신 곳인데 아무나 들락거리면 실례겠네요"라며 그 경건함에 기꺼이 마음을 보탰다.

전시관 내부를 둘러보니 제주의 신성한 설화와 역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영상실에서는 고(高), 양(梁), 부(夫) 삼인의 설화가 입체적인 영상으로 펼쳐졌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제주 신화만의 독특한 성격이다. 우리나라 건국 신화 대다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과 달리, 삼성혈의 신화는 세 신인이 땅에서 솟아났다는 '용출(湧出)'의 서사를 담고 있다.

이는 제주의 땅 자체가 스스로 생명력을 잉태하고 밀어 올린 신성한 근원임을 상징한다. 사냥을 하며 원시적인 생활을 하던 세 신인은 동쪽 온평리 바닷가(연혼포)에서 벽랑국 공주들을 맞이하고, 그 근처 연못(혼인지)에서 혼례를 올리며 비로소 가족과 사회의 형태를 갖추었다. 공주들이 가져온 송아지와 오곡의 씨앗은 이 섬에 농경과 목축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 만남을 기점으로 제주는 정착 사회로 변모하며 탐라국의 기틀을 다진 것이다.

전시관 한편에는 당시 세 신인이 입었을 법한 화려한 관복과 공주의 옷을 재현해 놓은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어 소소한 재미를 주었다. 영상을 본 아내는 "어머니의 성씨인 고씨가 그 중심에 있었다니 더 근사해 보여요"라며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주가 지켜온 천년의 자존심

아내와 함께 담장 밖 소음을 뒤로하고 다시 숲길을 걸어 나오며 생각했다. 이 고요함이야말로 제주 사람들이 수천 년간 지켜온 탐라의 자존심일지도 모른다고.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세 구멍에는 아무리 거센 폭우가 쏟아져도 빗물이 고이지 않으며, 온 세상을 덮는 폭설 속에서도 눈이 쌓이지 않는다고 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태초의 순수함을 간직하려는 듯한 이 이야기야말로, 탐라의 저력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웅변하는 듯했다.
 고목들이 하늘을 가릴 듯 빽빽하게 솟아 있는 '장수의 숲길'. 걷는 것만으로도 영험한 기운이 느껴진다.
ⓒ 전갑남
제주인들에게 삼성혈은 단순히 오래된 유적지가 아니다. 척박한 섬이라는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의 뿌리를 땅에서 밀어 올린 독자적인 문명에 대한 자부심의 근원이다. 그들은 지금도 이곳을 탐라의 신령한 기운이 서린 성소로 여기며 정성껏 경배하고 있다. 숲길에서 얻은 맑은 기운과 제주인들의 뿌리 깊은 자존심을 가슴에 품고, 우리의 제주 여행은 비로소 한층 더 풍성해졌다.

[삼성혈 관람 핵심 정보]

위치 : 제주시 삼성로 22 (제주공항에서 차로 15분)
시간 : 09:00 ~ 18:00 (연중무휴 / 입장 마감 17:30)
요금 : 성인 4000원 / 경로(65세 이상) 1500원 / 청소년·어린이 2500원·1500원
주차 : 관람객 1시간 무료 주차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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