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남' 빌런 유지태, 장항준 감독 때문에 연기 몰입 어려웠던 속내
[이준목 기자]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만 바라고 있는 '어리석은 여우'가 되는 걸 너무 싫어한다. 후배들이 '남이 나한테 일을 줄때까지 기다리는 배우'로 살지 않았으면 한다. 능동적인 배우, 쟁취하는 배우가 되어야 한다. 남이 일을 줄 때까지 기다리는 배우가 되면 '갑질을 당해도 된다'는 개념이 생겨버린다. 만약 일이 없다면 '네 영화를 직접 만들어라.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니 너희의 인생을 쟁취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25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는 배우 유지태가 출연했다.
유지태는 '단종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1500만 관객을 돌파한 화제의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악역인 한명회 역을 열연했다. 유지태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흥행작이자 데뷔 28년만에 첫 '천만 영화'이기도 하다.
"제 인생에 이런 일이 있나 싶다. 그전에 성공했던 작품은 있었는데 천만 관객은 처음이다. 이번에 친구들이 포털사이트에서 천만 배우 프로필에만 붙는 '황금트로피'를 캡처해서 보내줬는데 너무 뿌듯했다. 최근에 <왕사남> 쫑파티를 했는데 비싼 한우를 먹고 계산할 때도 다들 웃고 있더라(웃음). 이런 분위기를 살면서 또 겪을 수 있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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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퀴즈 유지태 |
| ⓒ tvN |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부터 느껴지는 게 있었다. 이 극의 중심을 잡고 있는 건 한명회다. 기존의 한명회는 <관상>에서 김의성 배우가 연기한 것처럼, 주로 음흉하고 교활한 캐릭터였다. 그런데 당대 사료를 보면 한명회는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에 빛이 나서 모두가 우러러 봤다'고 기록되어있더라. 감독님의 설명을 듣고 '잘하면 또다른 한명회를 만들 수도 있겠다. 변신의 기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지태는 AI(인공지능)에 자료들을 입력하고 한명회의 이미지를 분석했다. 한명회는 문신이면서도 계유정난의 실질적인 설계자였기에 힘과 지략을 겸비한 캐릭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유지태가 내린 결론이었다.
"한명회는 문신이었지만 궁궐 문지기 일을 했다. 그래서 굉장히 무시당했고 콤플렉스가 많았던 인물이다. 그 무시당했던 기억이 계유정난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한명회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었을까? 한명회의 애티튜드는 어땠을까를 생각하면서 연기했다."
유지태는 권신 한명회의 냉혹하고 위협적인 면모를 외적으로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했다. 단종 역을 연기한 배우 박지훈이 폐위된 어린 왕의 초췌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하여 15kg를 감량했다면, 유지태는 한명회의 장대한 기골을 재현하기 위하여 정반대로 체중을 크게 증량했고 눈가에는 의료용 테이프를 붙여서 눈매를 날카롭게 끌어올렸다. 박지훈은 극중 유지태와 처음 대면하는 장면에서 "눈을 못 마주칠 정도로 무서웠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 작품에서 악역이 한명회 밖에 없기 때문에 외적으로도 악인으로서의 임팩트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제가 봐도 거대하게 나와서 조금 놀랐다. 단기간에 체중 증량을 하다보니 몸에 무리가 가서 고지혈증에 급성위염까지 생겼다. 사실 장항준 감독님은 조금 '슬림한 한명회'를 원하셨기 때문에 저를 보고 별말은 안하셨지만 썩 좋아하지는 않으시더라(웃음)."
후반부 단종과 한명회의 대립 장면은 영화의 대표적인 명장면으로 꼽힌다. 폐위된 단종을 "아직도 왕인줄 아는가"라고 조롱하며 표독스럽게 압박하는 간신 한명회의 포스. 이에 분노하여 "네놈이 왕족을 능멸하는가"라고 꾸짖으며 물러서지 않는 단종의 날선 대립은, 이야기의 긴장감을 절정으로 극대화시키는 순간이었다.
"사명감이 좀 있었다. 극이 살려면 한명회가 잘 보여서 긴장감을 줘야한다고 생각했다. 그 장면은 장항준 감독님이 정말 잘 찍으셨다. 극중에서 한명회가 화를 내며 발을 뜯어내는 것도 감독님의 아이디어였다. 감독님은 제가 그동안 했던 악역과는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자 하는 욕심이 있으셨다."
하지만 정작 유지태는 현장에서 장항준 감독 특유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때문에 종종 연기에 몰입이 어려웠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고백했다. 익살스러운 성격의 장 감독은 배우가 한창 진지하게 감정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역시 한국영화의 산 증인 유지태"를 운운하며 과장된 칭찬과 호들갑스러운 리액션으로 유지태를 당황하게 만들기 일쑤였다고. 그럼에도 유지태는 연출자로서 장항준 감독에 대한 칭찬도 빼놓지 않았다.
"장 감독님의 가장 큰 장점은 '수용력'이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들으신다. 주관이 굉장히 강한 감독이나 배우도 있는데,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줄 아는 것은 공동작업에서 플러스 요소가 된다. 그리고 재치있는 작가성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한국에서 <인생은 아름다워>같은 영화를 만들수 있는 감독이 있다면 바로 장항준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멜로물 출연 자제하고 악역 연기 속사정
유지태는 한때 <봄날은 간다><동감>등 명작 멜로영화의 주인공을 도맡던 청춘스타였다. 하지만 아내(배우 김효진)과 결혼 이후에는 멜로물 출연을 자제하고 악역을 더 많이 연기하게 되었다는 속사정을 전했다.
"제가 '진지과'라서 배역을 맡으면 계속 몰입하는 편이다. 멜로물, 그것도 너무 찐한 멜로를 하게 되면 마음이 너무 힘들더라. 그래서 차라리 마음 편한 악역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유지태는 배우 활동 외에도 건국대 매체연기학과 전임교수로 3년째 재직하며 학과장을 맡는 등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유지태는 "배우 선배로서 미래의 배우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지태는 오래전부터 가정폭력, 코로나19 펜데믹 지원, 산불 성금 기부 등 다양한 선행과 사회복지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배우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간호사였던 어머니를 도와 요양원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가 이처럼 사회 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에는, 어린 시절 자전적 경험의 영향도 컸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혼자 어머니를 모시고 살다보니까, (힘든 이들의) 마음을 조금 이해하는 부분도 있다. 내가 모든 걸 다 책임지지는 못할텐데 어떻게 해야하지 생각하면, 결론은 '시스템'이다. 취약계층을 위한 시스템이 만들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유지태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감정이 북받친듯 눈시울을 붉혔다. 대구 출신 미스코리아이자 간호사 출신으로 강인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를 좋아하게 됐고, 본인의 연출작에도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저희 어머니는 강인한 억새풀 같은 분이셨다. 저의 인생에 가장 크게 각인된 분이다. 그래서 제가 만드는 영화에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강인한 여성상을 담은 영화를 좋아하고 그런 영화를 연출하고 싶었다. 어머니와는 추억이 많다. 언젠가는 저희도 이별을 해야할 때가 올테니 항상 마음이 쓰인다."
유지태는 <왕사남>처럼 천만영화의 감격을 또 느껴보고 싶다며, 앞으로 침체된 한국영화 시장이 다시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 한국영화 시장이 급속도로 축소되고 영화관들이 문을 닫는 것을 보면서 축구선수가 운동장을 잃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계속 영화를 하고 싶은데 '내 필드가 없구나'라는 생각에 상당히 오랜 기간 우울감이 있었다. 앞으로 천만영화가 없겠구나, 영화가 사장 산업이 되겠구나 싶었는데, 제가 출연한 영화가 이렇게 성공을 하니까 이제는 '가능성이 있다' 싶다. 이 작품에 출연한 걸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 영화를 사랑해주는 관객들이 계셔서 가능했던 것 같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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