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 사건이 나랑 무슨 상관?” 십자가 앞에서 길을 잃은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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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절제의 절기인 사순절 기간 우리는 다시 십자가를 바라본다.
두 방식 모두 나름의 가치가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에서 십자가와 우리 사이에 오히려 좁힐 수 없는 심연을 만들어냈다.
바로 그곳에서 십자가는 더 이상 타인의 비극이 아니라 나 자신의 진실을 비추는 사건이 된다.
화려한 고백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들고 십자가 앞에 서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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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 년 전의 비극에서 나의 ‘참된 나’를 발견하는 거울

침묵과 절제의 절기인 사순절 기간 우리는 다시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런데 솔직히 자문해보자. 그 십자가가 정말 ‘나의 것’으로 느껴지는가. 수십 년을 신앙생활 해온 사람도 십자가 앞에서 문득 이런 생각을 품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저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2000여년 전 팔레스타인의 어느 언덕 위에서 벌어진 사건이 지금 여기 나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도서출판 비아가 국내 처음 소개한 세바스천 무어(1917~2014)의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낯선 이가 아니다’는 바로 이 간극을 파고든다. 영국 출신의 신학자이자 영성가인 저자는 인간 영혼의 심연을 탐구해온 ‘지도 제작자’로 불린다. 그는 심층 심리학과 고전 신학을 통합해 현대인이 겪는 존재론적 불안의 해법을 십자가에서 찾았다. 1977년 처음 출간된 이 책은 반세기 가까이 수많은 판을 거듭하며 읽혀온 십자가 신학의 고전이다.

무어의 출발점은 단순하다. 십자가를 ‘그때 거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현실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십자가에 접근해 온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역사적 사실에 집중하는 방식, 다른 하나는 교리적 의미를 논리적으로 따지는 방식이다. 두 방식 모두 나름의 가치가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에서 십자가와 우리 사이에 오히려 좁힐 수 없는 심연을 만들어냈다. 예수는 숭배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나와 본질적으로 연결된 존재로 다가오기 어려운 ‘낯선 이’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무어의 통찰은 십자가 위의 예수를 단순한 희생자로만 보지 않는 데서 빛난다. 바로 그 시각에서 십자가는 예수의 고난을 기념하는 표지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집요하게 자기 안의 진실을 밀어내고 억압하며 끝내 죽이려 드는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거울이 된다. 십자가가 낯설었던 까닭은 그것이 너무 멀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가까워 외면해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어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인간의 악을 폭로하는 상징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슬픔과 용서, 변모의 길로 전환하는 상징이다.

혐오와 배제, 자기 포장과 불안, 끝없는 비교와 자기부정이 일상이 된 시대에 무어는 죄의 본질을 바깥을 향한 폭력 이전에 자기 자신을 향한 깊은 훼손과 혐오에서 찾는다. 그리고 십자가를 그 자기 혐오가 끝내 사랑 앞에서 해체되는 자리로 읽는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구원은 외부에서 선고되는 판결이 아니라 자기 안에 묻혀 있던 참된 존재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에 가깝다.
이 책은 십자가를 설명하는 책이라기보다 십자가 앞에 독자를 세워 놓는다. 점잖게 정돈된 신앙의 언어로는 닿을 수 없는 내면의 깊은 자리, 오래된 죄책감과 수치, 상처와 결핍의 자리까지 독자를 데려간다. 바로 그곳에서 십자가는 더 이상 타인의 비극이 아니라 나 자신의 진실을 비추는 사건이 된다.

오래된 십자가의 상징을 오늘의 언어로 되살려낸 이 책은 신학 서적이면서도 결국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물음으로 돌아간다. 사순절은 본래 그런 계절이 아닌가. 화려한 고백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들고 십자가 앞에 서는 계절. 그 앞에 비로소 설 때 우리는 알게 된다. 그분이 건네는 것은 심판의 언어가 아니라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다는 것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처음부터 낯선 이가 아니었다.
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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