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을의 반란'…삼전닉스, 장기계약으로 반도체 사이클 흔든다
사이클 산업서 변화 조짐…AI 시대 수요 변화 감지
(서울=연합인포맥스) 윤영숙 기자 = 인공지능(AI) 메모리 수요 급증 속에서 반도체 산업의 '갑을(甲乙) 관계'가 구조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가 최근 정기 주주총회에서 일제히 '장기공급계약(LTA)' 확대를 주요 전략으로 제시하면서, 전통적인 반도체 업황 사이클을 완화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되고 있다.

◇ "3·5년짜리 계약 추진"…"LTA 요청 들어와"
26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전영현 부회장은 최근 주주총회에서 "주요 고객사들과 기존 분기·연 단위 계약에서 3년, 5년 단위의 다년 공급 계약을 추진하고 있다"며 "이를 통해 실적 가시성을 확보하고 수요 변동에도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단기 가격 변동에 의존하던 기존 구조에서 벗어나, 계약 기반으로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만들겠다는 의도다.
그동안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대표적인 경기 민감 업종으로 꼽혔다. 수요가 급증하는 호황기에는 초과 이익을 내지만, 공급 과잉이 발생하면 단기간에 적자로 전환되는 극단적인 실적 변동성이 반복돼왔다. 특히 공급자였던 메모리 업체들은 가격 결정권을 온전히 확보하지 못한 채, 빅테크(거대 정보기술기업) 고객사의 수요 변화에 따라 실적이 크게 좌우되는 '을'의 위치에 머물렀다.
그러나 AI 시대는 이 공식을 흔들고 있다.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중심으로 한 AI용 메모리는 공급이 제한적인 반면, 수요는 구조적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공급자가 협상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슈퍼 을'의 등장이다.
SK하이닉스 역시 같은 방향성을 명확히 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도 "최근 메모리 공급이 좀 제한적인 상황이 지속되면서 고객들하고 중장기 공급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또한 "LTA 체결 요청도 들어오고 있다"며 "장기 계약을 통해 고객들에게는 공급 안정성을 제고하고, 회사로서는 장기적인 수익성과 사업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 메모리 사이클 바뀌나…AI 시대로 수요 변화 감지
이 같은 흐름에는 지금의 AI 수요가 단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빅테크와 메모리 업계의 판단이 깔려 있다.
SK하이닉스의 주주총회에서 한 주주는 "반도체 빅사이클이 오면서 저희가 슈퍼을 입장에서 계약하지만, 사이클이 갑자기 꺾였을 때 영업이익이 급격하게 감소하지 않느냐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곽 사장도 "(메모리가) 사이클 산업이긴 하지만, 반도체가 AI 시대에서부터는 조금 바뀌는 것 같다"라며 "2년 호황, 2년 불황 이런 식의 '업 앤 다운'이 반복되는 사이클에서 조금 탈피하는 양상들이 감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흐름은 고객사들의 장기공급계약 체결 요청이 증가한 데 따른 것이다.
LTA 전략의 핵심은 '가격'이 아니라 '관계'다. 단기 계약에서는 시장 가격이 급변할 경우 공급자 수익성이 크게 훼손될 수 있지만, 장기 계약에서는 일정 수준의 가격과 물량이 사전에 합의된다. 이는 반도체 업체 입장에서는 현금흐름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고객사 입장에서는 핵심 부품의 안정적인 확보를 보장받는 구조다.
특히 AI 반도체 생태계에서는 공급 차질 자체가 서비스 경쟁력 저하로 직결된다. 엔비디아 등 주요 빅테크 기업들이 메모리 확보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이 과정에서 메모리 업체들은 단순 부품 공급자를 넘어, 전략적 파트너로 위상이 격상되고 있다.
다만 모든 수요를 장기 계약으로 흡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SK하이닉스도 현재 공급이 빠듯한 상황에서 고객 관계, 제품 믹스, 중장기 수요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LTA를 선별적으로 체결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장기 계약 확대와 동시에 시장 대응 유연성을 유지하려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이 같은 흐름이 정착될 경우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밸류에이션 체계 자체가 달라질 가능성도 있다.
곽노정 사장은 "(장기 계약 방식의) 이러한 사업 구조가 정착이 된다면 메모리 사업에 대한 시장의 평가도 훨씬 더 가치를 높이는 쪽으로 볼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는 실적 변동성이 낮아질수록 시장은 보다 높은 프리미엄을 부여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다만, AI가 만든 공급자 우위 시장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AI 수요도 다년간 지속돼야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ysyoon@yna.co.kr<저작권자 (c)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opyright © YONHAPINFOMA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