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끼리 매매·결제…산업 판도 바꾼다 [AI 딥다이브]
최근 김서준 해시드 대표가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글이 국내 테크 업계에서 화제다. 김 대표는 ‘남의 문은 드나들면서 자기 문은 단단히 잠그는 모순’이라며 한국 테크 산업 폐쇄성을 꼬집었다.
그는 AI(인공지능) 에이전트 관련 서비스를 개발한 업체가 국내 여러 기업에 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API) 연동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일화를 소개했다. 국내 기업은 자사 서비스를 오픈AI 챗GPT에 연동해 외부 창구를 적극 활용하면서도, 정작 외부 연동 요청에는 ‘비즈니스 심사가 필요하다’며 문을 걸어 잠갔다는 사연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특정 기업 문제에 국한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글로벌 시장은 각 AI 기업끼리 수만개 서비스가 담장을 허물고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주고받는 개방형 생태계로 진화하고 있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과거 성공 방식에 갇혀 문을 닫아걸면서 경쟁자를 막으려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김 대표는 애석하게 봤다. 그러면서 김 대표는 글로벌 시장 주류 표준 개념을 AI 생태계 변화의 핵심으로 꼽았다. 세계 시장은 수억개 AI 에이전트가 사람 개입 없이 스스로 교류하고 결제하는 거대 인프라, 이른바 ‘X402’와 ‘ERC-8004’로 빠르게 넘어가는 추세다. 전 세계 빅테크가 사활을 걸고 구축 중인 두 기술이 어떤 개념이며 우리 산업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그 이면을 들여다봤다.

AI끼리 소통하는 지갑·여권
AI 에이전트 경제의 핵심 인프라로 떠오른 ‘X402’와 ‘ERC-8004’는 그 독특한 명칭 속에 각각의 개발 배경과 작동 원리를 담고 있다.
먼저 에이전트의 지갑 역할을 수행하는 ‘X402’는 코인베이스(Coinbase)가 제안한 규격이다. 이 용어의 뿌리는 인터넷 표준 프로토콜인 HTTP의 상태 코드에서 찾을 수 있다. 인터넷 초기 설계자들은 애초에 HTTP 402 상태 코드를 ‘Payment Required(결제 필요)’ 용도로 할당해뒀으나, 당시 기술적 구현의 한계로 오랫동안 방치돼왔다. 코인베이스는 AI 에이전트가 사람의 개입 없이 스스로 초소액 결제를 진행하는 표준을 구축하며, 잠들어 있던 이 ‘402’라는 숫자를 다시 가져와 X402라는 이름을 명명했다.
반면 에이전트의 여권으로 불리는 ‘ERC-8004’는 이더리움(Ethereum) 기술 표준의 명명 규칙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 여기서 ERC는 ‘Ethereum Request for Comments’의 약자로, 이더리움 네트워크 내에서 새로운 기능·기술 규격을 제안하고 토론하는 형식의 기술 제안서를 의미한다. 이 제안서들은 등록된 순서에 따라 일련번호가 부여되는데, 이에 따라 ‘ERC-8004’는 AI 에이전트의 신원·평판 인증에 관한 표준 제안이 이더리움 커뮤니티에 8004번째로 등록돼 승인된 규격임을 나타낸다.
X402와 ERC-8004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기계가 사람 승인 없이 스스로 경제 활동을 하도록 돕는 인프라라는 데 있다. 비유하자면 해외여행을 갈 때 챙겨야 하는 지갑과 여권이다. 윤석빈 서강대 AI·SW 대학원 특임교수는 “X402는 AI 결제 카드 역할을 하는 지갑이고, ERC-8004는 AI 능력과 과거 이력을 위조 불가능하게 증명하는 신분증 겸 이력서”라고 설명했다.
코인베이스는 지난해 5월 X402 프로토콜을 선보인 데 이어 9월에는 클라우드플레어와 공동으로 X402 재단을 설립해 생태계 구축에 나섰다. 구글과 비자 역시 자율형 인프라에 이 표준을 채택하며 힘을 보탰다. 출시 6개월 만에 1억건 이상 거래를 처리했을 정도다. 이더리움 진영도 발맞춰 움직인다. 메타마스크와 이더리움 재단, 구글, 코인베이스 소속 엔지니어들이 함께 초안을 짠 ERC-8004는 올해 초 이더리움 메인넷에 정식 배포돼 상용화 단계에 진입했다.
두 기술이 화두로 떠오른 배경은 기계 간 거래에 특화한 속도와 수수료 이점이다. AI는 데이터를 분석하고자 1초에도 수십번씩 1원 단위 초소액 결제를 이어가야 한다. 기존 신용카드 결제망을 쓰면 고정 수수료가 커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다.
김민수 에스투더블유(S2W) 데이터혁신팀장은 “에이전트는 소액 결제가 많은데 기존 카드 시스템은 고정 수수료와 비율 수수료가 합쳐져 수용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반면 X402는 가격 변동성이 없는 스테이블코인과 온체인 네트워크를 활용해 1원도 안 되는 수수료로 수천번 결제를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다.
중앙 기관 없는 투명한 신뢰 구축 메커니즘도 핵심이다. 얼굴 모르는 기계끼리 신뢰를 쌓는 비결은 블록체인에 영구 기록되는 온체인 레지스트리(블록체인 네트워크상에 데이터를 기록해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위변조는 불가능하게 만든 분산 저장소)에 있다.
배달 앱에서 음식을 실제 주문한 사람만 리뷰를 남기듯 X402를 통해 비용을 지불한 기록이 있는 경우에만 평점을 남겨 가짜 조작을 원천 차단한다. 윤 교수는 “특정 기업 보증 없이도 수학으로 증명된 투명한 거래 기록과 평점만 보고 기계끼리 서로 믿고 고용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관련 시장만 80조원
AI 레고처럼 조립…글로벌 수익도
이런 인프라가 정착하면 산업 판도는 개인 간 직거래 위주로 팽창할 가능성이 높다. 관련 시장 규모가 수년 내 80조5000억원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당장 클라우드 시장부터 거대한 지각변동을 맞을 수 있다. 과거에는 대기업에 거액을 내고 컴퓨터 자원을 빌려 썼지만 앞으로는 전 세계 유휴 자원을 1초 단위로 쪼개 기계가 직접 사서 쓰는 시대가 올 수 있다. 김 팀장은 “과금 단위가 구독에서 에이전트 API 호출 단위(AI 에이전트가 다른 프로그램 기능을 사용할 때마다 건별로 비용을 지불하는 방식)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며 “특정 인프라 종속 없이 전문 도메인별 표준 기반 시장으로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데이터 거래 방식도 뒤바뀔 전망이다. 창작자나 블로거 글을 AI가 학습용으로 읽어갈 때 창작자 지갑으로 10원 단위 수익이 즉각 꽂히는 직거래 생태계가 열릴 수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 환경 역시 레고 블록을 쌓는 것처럼 쉬워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번역만 전문으로 하는 AI를 시장에 올려두면 전 세계 다른 AI들이 알아서 이 번역 AI를 찾아내 고용하고 즉시 사용료를 지불하는 식이다.

보안 위협 극복·표준 선점이 과제
화려한 청사진 이면에는 풀어야 할 한계와 보안 리스크가 숨어 있다. 가짜 계정을 수만개 만들어 평점을 조작하는 시빌 공격(한 사람이 수많은 가짜 계정을 만들어 생태계 평판이나 투표 결과를 조작하는 해킹 수법)이나 결제금을 탈취할 위험이다.
업계는 이를 막고자 보증금 압수 방식을 속속 도입하는 추세다. 윤 교수는 AI가 일을 맡을 때 보증금을 내고 사기를 치거나 결과물을 조작하면 이를 즉시 몰수하는 시스템을 설명하며 “대중이 안심하고 쓸 수 있는 신뢰 기반 AI 환경 조성이 선결 과제”라고 짚었다.
두 기술 상호보완적 결합도 필수다. 김 팀장은 “X402 결제 한도 제어나 악성 가격 정책 문제는 ERC-8004 평판 시스템으로 풀고, ERC-8004 평판 조작 위험은 실제 결제 이력만 반영해 제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수호 기자 park.suho@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52호(2026.03.25~03.3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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