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부부 이야기] 결혼 19년차인데 셔츠 색깔 괜찮은지 물어볼 사람이 없다

신재호 2026. 3. 2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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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부부 남편 이야기] 갑작스러운 인사발령으로 강제 사택 살이

사는 곳도, 하는 일도 다른 두 부부가 비슷한 시기에 주말부부가 되었습니다. 아내와 남편 입장에서 주말 부부 이야기를 씁니다. <편집자말>

[신재호 기자]

아침에 눈을 떴다. 뒷목이 묵직하니 간밤에 잠을 설쳤나 보다. 조잡한 하얀 벽지, 녹색 창틀이 더 낯설게 다가왔다. 1인용 밥솥에 쌀을 넣고 타이머를 누른 뒤 씻으러 화장실로 갔다. 온기가 서려 있지 않은 공간에서 간단히 고양이 세수만 하고 나왔다. 아침마다 샤워하는 오랜 습관도 이곳에선 사치 같았다.
 식탁을 대신한 캠핌용 테이블. 이곳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 신재호
그 사이 밥이 다 되었네. 거실에 놓은 캠핌용 테이블 위에 밥상을 차렸다. 반찬은 냉장고에서 꺼낸 밑반찬과 김치, 김, 달걀부침이 전부다. 단출하지만 한 끼 식사론 부족함이 없다. 설거지를 마치고, 물걸레로 바닥 청소까지 마치면 출근 준비를 한다.

아직 짐을 다 풀지 않은 캐리어 안에서 셔츠를 꺼내 외투와 챙겨 입었다. 왠지 색감이 어울리지 않아 보였지만, 물어볼 사람도 없다. 회사 인사 발령으로 주말부부가 된 지 두 달, 이것이 요즘 내 출근 풍경이다.

인사발령으로 인한 갑작스런 주말부부

올해 초였다. 사내 게시판에 인사 공고가 떴다. 아직 다른 곳으로 이동할 시기가 되지 않았기에 혹시나 떠나는 직원이 있나 검색하던 중 저 멀리에서 날 부르는 큰 소리가 들렸다.

"과장님! 이번에 발령 났는데요. 그것도 멀리 가세요!"

그 소리에 놀라서 직원 명단에서 내 이름을 급히 검색해 보았다. 맙소사. 후배 말처럼 떡하니 내가 있었다. 두 가지 악재가 있었다. 사는 곳에서 먼 지역 발령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새롭게 설립하는 기관의 개청 단원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몰려오는 당황스러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일단 정신을 차리고 본사 인사팀에 있는 아는 직원에게 연락했다. 회사 차원에서 적임자로 낙점되어 발령을 낼 수밖에 없었고, 보안 사안이라 사전에 연락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당연한 일임을 알면서도 그저 푸념만 늘어놓다가 전화를 끊었다.

저 멀리 제주도까지 분점이 있는 직장에 들어와 언젠가는 집을 떠나 타지에서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더랬다. 하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막막할 뿐이었다. 해당 기관에 문의했더니 사택 제공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나마 살 집이 있다는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 인사 발령 후 처음 사택에 갔을 때 마주한 장면 사택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휑한 공간에 거대한 냉장고 한대만 있었음
ⓒ 신재호
상황은 좀 다르지만, 얼마 전 보았던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속 주인공 김낙수가 본사에서 좌천된 후 지방 공장에 발령 나 회사 사택에서 생활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사택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한 휑한 공간에서 한숨 짓는 장면에서 내 모습이 겹쳤다. 사람 사는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방, 거실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냉장고. 앞이 깜깜했다. 지은 지 20년도 더 되어 내관은 어릴 때 살았던 집처럼 낡았다.
드라마에선 주인공 김낙수가 점심을 먹기 위해 구내식당 가는 장면이 코믹하게 그려졌다. 늦으면 반찬이 없다는 걸 경험하곤 마치 곡예하듯 지름길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는데 막상 그 상황이 되면 나라도 그렇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직 기관이 개청된 상황이 아니라 구내식당도 없고, 당장 먹는 것이 문제였다. 다행히 인근 백반집에서 배달이 가능해 점심은 해결되었지만, 아침과 저녁이 문제였다.
▲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속 공감가는 내용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속 주인공 김낙수가 점심 시간에 달려가는 장면
ⓒ JTBC
매번 사 먹기도 부담되었고, 해 먹자니 준비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당근마켓에서 1구짜리 인덕션과 1인용 밥솥을 사고, 마트에서 프라이팬, 국통, 국자, 집게 등등 식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 물품을 구매했다. 주말부부 소식을 들은 어머니께서 밑반찬도 챙겨 주셔서 냉장고에 쟁여 놓았다. 각종 양념은 인터넷으로 구매했다.

의식주의 불을 끄고 나니 이젠 외로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근무 시간엔 정신없이 일정이 돌아가느라 몰랐는데, 퇴근 후 사택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은 고독했다. 그동안 타지로 발령 난 직원에게 3대가 덕을 쌓아야 가능한 주말부부를 한다며 부러움을 빙자한 농담을 했는데... 미안하다. 현실을 몰랐다.

어딘가에 구속받지 않고 마음껏 자유를 누릴 거로 생각해서 부럽기도 했건만, 현실은 멍하니 핸드폰 뒤적거리다 잠에 드는 것이 전부였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초반엔 잠도 자주 설치고 자고 나도 계속 피곤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 각오
▲ 사택을 아늑한 공간으로 만들다 썰렁했던 사택을 사람 냄새 나는 공간으로 바꾸다
ⓒ 신재호
'인간은 집이라는 안락한 장소에서 첫째로 육신의 따뜻함을 다음엔 사랑을 따듯함을 구한다'라는 명언이 있다. 집은 단순히 의식주만 해결하는 곳이 아닌 함께 사는 사람들의 사랑과 온기로 채워지는 곳이란 의미이다. 같이 있을 땐 그렇게 지지고 볶더니 떨어져 있으니 문자 하나, 전화 한 통에도 애틋함이 담겼다. 가족의 소중함을 절절히 깨닫는 중이다.

한동안 가족과 살 순 없으니 적어도 혼자서라도 아늑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창문에 커튼도 달고, 책상도 구매해서 독서하거나 틈틈이 글 쓸 공간도 조성했다. 최근엔 인터넷으로 현수막 그림도 사서 한쪽 벽에 걸어 놓았다. 그렇게 꾸미고 나니 그제야 사람 사는 집 같은 분위기가 났다.

앞으론 최소 3년 간은 떨어져 지내야 한다. 풍문으로만 들었던 주말부부가 현실이 되었다.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여전히 의문이지만 하나씩 해나가고 있다. 한편 좋은 기회란 생각도 든다. 어차피 언젠가 혼자가 될 터인데 연습한다는 생각으로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채워 나가야겠다.

《 group 》 주말부부 이야기 : https://omn.kr/group/two_house_story
사는 곳도, 하는 일도 다른 두 부부가 비슷한 시기에 주말부부가 되었습니다. 아내와 남편 입장에서 주말부부 이야기를 씁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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