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세월 품은, 농부들의 '노란 달력'이 피었습니다

김홍의 2026. 3. 25.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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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4월 3일 축제 시작하는 이천 산수유마을... 선비의 기개와 농사의 지혜를 느껴보세요

[김홍의 기자]

 연노랑 꽃망울이 터지듯 피어나는 산수유. 잎보다 먼저 피어난 꽃이 봄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 김홍의
산자락의 복수초가 수줍게 봄을 알린다면, 농부의 마음을 연노랑으로 물들이며 한 해의 시작을 알리던 꽃은 산수유다. 전라도의 구례 산수유마을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수도권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오랜 역사와 정취를 간직한 곳이 있다. 바로 이천시 백사면의 산수유마을이다.

25일 축제를 준비 중인 이천 산수유마을을 찾았다. 마을에 들어서면 돌담길 사이로 노란 꽃망울이 번지듯 피어 있다. 축제를 앞둔 마을에는 현수막이 걸리고 길가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손님 맞을 준비로 분주하다. 하지만 그 풍경 너머로는 여전히 오래된 농촌 마을의 고요한 시간이 흐른다.

선비들의 기개가 꽃으로 피어나다
 기묘사화를 피해 낙향한 선비들이 육괴정 주변에 심은 나무가 봄마다 마을을 노랗게 물들인다.
ⓒ 김홍의
이천 산수유마을의 역사는 약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중종 때 조광조를 따르던 선비 엄용순이 기묘사화를 피해 이곳으로 낙향했다.

뜻을 같이한 다섯 명의 선비와 함께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으며 마을의 기틀을 마련했는데 이곳이 바로 육괴정이다. 이들은 정자 주변에 느티나무와 산수유나무를 심었다. 그때 심어진 나무들이 세월을 지나 거대한 군락을 이루었다. 지금은 봄마다 마을 전체를 노란 꽃구름으로 물들이는 풍경을 만든다.

육괴정 주변에 서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는 지금도 마을의 시간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그 아래를 지나 걷다 보면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오랜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산수유가 피면 농사 준비가 시작된다. 산수유는 농부들에게 봄을 알리는 살아있는 달력이였다.
ⓒ 김홍의
마을 길을 걷다 보면 문득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왜 유독 농촌 마을에는 산수유나무가 많을까. 계절의 흐름에 순응해야 하는 농촌에서 산수유는 단순한 관상용 꽃이 아니었을 것이다. 산수유 꽃망울이 부풀어 오를 때쯤 농부들은 비료를 주며 흙을 준비하고 꽃이 피기 전에 고랑을 만든다. 그리고 산수유가 본격적으로 피기 시작하면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

달력이 귀했던 시절, 선조들은 자연의 변화를 통해 농사의 때를 읽었다. 노란 산수유 꽃은 농번기의 시작을 알려주는 하나의 기준이었고 그래서 산수유는 농부들에게 '살아있는 달력'과도 같은 존재였다. 또한 늦가을에 수확한 산수유 열매는 농가의 소중한 소득원이 되기도 한다. 차나 술로 만들어 먹거나 한방에서 약재로 쓰이기도 한다.

산수유는 한 해의 시작을 알려주고 자식들 학비를 보태며 가족의 삶을 지탱해 주던 열매였으니, 농가에서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삶 그 자체에 가까운 존재였을 것이다.

자연이 그린 수묵담채화, 산수유의 사계
 돌담길과 어우러진 이천 산수유마을의 정취.여름과 가을, 겨울은 또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 김홍의
산수유마을은 봄에만 찾는 곳은 아니다. 겨울 가지 끝에서 연노랑 꽃이 점을 찍듯 피어나는 봄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폭의 수묵담채화 같다. 돌담과 농지를 배경으로 핀 노란 꽃은 사람과 자연이 함께 그린 그림처럼 보인다.

연노랑 빛은 연녹잎과 어우러지며 점점 옅어지고 마을은 그렇게 여름을 맞이한다. 가을이 되면 나뭇가지 위로 선홍빛 열매가 맺히며 또 다른 풍경을 만든다. 겨울날, 붉은 산수유 열매 위로 눈이 쌓인 풍경 또한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렇듯 계절마다 색다른 풍경을 선사하는 산수유나무는 사시사철 다채로운 매력을 뽐낸다.

한편, 올해 이천 백사 산수유꽃축제는 오는 4월 3일부터 5일까지 열린다. 축제 기간에는 산수유를 주제로 한 다양한 체험과 먹거리, 그리고 육괴정 주변의 산책로를 함께 즐길 수 있다. 산수유나무를 따라 이어진 길은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산수유 군락지를 여유롭게 즐기고 싶다면 축제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찾는 것을 추천한다. 축제가 시작되면 많은 방문객으로 마을이 북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른 아침 시간에는 사람들로 붐비지 않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돌담길과 노란 꽃이 어우러진 고즈넉한 풍경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아침 햇살이 꽃 위로 번질 때 마을을 걷다 보면 노란 산수유가 조용히 봄을 알리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산수유가 핀다는 것은 한 해의 시작을 준비할 때가 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올 봄, 이천의 돌담길을 걸으며 나만의 '인생 농번기'를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500년 세월을 버틴 노란 꽃망울은 말없이 봄을 알린다. 그 아래를 걷다 보면 우리 삶에도 다시 시작할 시간이 왔음을 조용히 깨닫게 된다.
 산수유가 피고 벌이 움직이며 시작되는 봄처럼, 한 해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 김홍의
[제27회 이천백사 산수유꽃축제]

- 축제 기간 : 2026. 4. 3(금) ~ 4. 5(일) / 관람료 무료
- 위치 :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산수유마을 일원
- 주차 : 공영주차장 및 행사 기간 임시주차장 운영 (무료)
- 셔틀버스 : 축제 기간 주요 거점 순환 운행
- 개화 현황 : 3월 하순 기준 약 50% 개화, 4월 초순 만개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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