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 안 계시니"... 팀장의 한마디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

안유림 2026. 3. 25.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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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의 수업료] 어머니 세대의 돌봄 노동 위에서 유지되는 딸의 커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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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유림 기자]

"내가 동기 중에 마지막 발령자잖아. 알지? 내가 연년생 낳으면서 외시 통과 후에 한 번도 재외공관 못 나간 거. 그러다 겨우 나갔는데… 복귀하자마자 또 휴직했다. 내가 오죽하면 딸한테 '여자는 공부해봤자 소용없다' 소리까지 했겠냐?"

외교관으로 일하는 친구의 말은 꽤나 충격적인 현실이었다. 그 어렵다는 외무고시를 통과하고도, 엄마라는 또 하나의 업(業)이 전문성을 갉아먹는 구조.

입직(새 직장에 들어가 일을 시작함) 직후 임신과 출산이 이어져 해외 공관 근무에서 밀렸고, 코로나19 시기 해외에서 지내는 동안 첫째 아이는 줄곧 집에만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가 적응에 어려움을 겪자 친구는 다시는 안 할 줄 알았던 휴직을 또 선택했다.

여성이 전문직이어도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상황의 해결책은 전문적이지 않다. 커리어를 유지하기 위해 치르는 비용은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개인에게 돌아온다. 특히 여성 개인에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4년 조사에 따르면 엄마가 된 여성 중 커리어를 유지하는 비율은 52% 수준이었다. 만약 지금 80·90년대생 엄마들에게 '출산 후의 커리어 명세서'가 미리 제공된다면 어떨까. 그 미래에 기꺼이 사인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친정엄마의 속사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2025)의 '가족 내 손자녀 돌봄 현황과 정책방안 연구'에 따르면 2~6세 영유아의 조부모 돌봄 비율이 가장 높았다.
ⓒ PXHERE
"제가 출근 시간 전에 잡힌 회의에 아이 등원 때문에 참석이 힘들다고 하자, 팀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친정엄마 안 계시냐고요. 근데 왜 내 친정엄마까지 끌어들여서 이야기해요? 지금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아요."

워킹맘 후배의 이야기다.

복직 후 친정엄마 집 근처로 이사 온 사실을 회사에서 알게 되자 이런 말들을 종종 들었다고 한다.
직장 내에서도 '워킹맘의 돌봄 공백'은 이미 당연한 전제가 된 지 오래다. 특히 긴급 돌봄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국가도, 제도도 아니다. 친정 혹은 시댁 어머니의 몸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2025)의 '가족 내 손자녀 돌봄 현황과 정책방안 연구'에 따르면 2~6세 영유아의 조부모 돌봄 비율이 가장 높았다. 조부모 부담이 가장 큰 유형은 장시간 근로를 하는 정규직 엄마가 있는 가정이었다. 소득 수준 또한 가장 높은 집단이었다.

엄마의 직업이 안정적이고 소득이 높을수록 조부모 돌봄 의존도는 더 높아졌다. 조부모는 평균 주 4.6일, 하루 약 6시간, 주당 27시간 돌봄을 제공했다.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10세 미만 손자녀를 돌보는 조부모의 53.3%가 "원하지 않았지만 자녀 사정으로 맡았다"고 응답했다. 그중 절반은 무보수였다.

국공립 어린이집 연장반과 초등 돌봄교실 등 공적 돌봄은 늘었지만 대부분 오후 6시면 끝난다.오후 7시, 8시에 퇴근하는 부모의 현실과는 여전히 맞지 않는다.

초등학생이 조부모 돌봄을 받는 이유 1위 역시 "부모 퇴근 전까지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58%) 였다. 결국, 많은 경우 딸의 커리어는 어머니 세대의 돌봄 노동 위에서 유지된다.

황혼육아의 대가
 긴급 돌봄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결국 친정 혹은 시댁 어머니의 몸이다.
ⓒ pixabay
"문제는 애들 방학 때죠. 하루는 친정엄마가 자기 집에서 우리 집까지 하루에 네 번도 왔다 갔다 하셨대요. 애들 셔틀 하느라고. 그러니까 뭐 애한테도 미안하고, 친정엄마한테도 할 말이 없고… 애가 초등학교 3학년 되면 방학 때 돌봄도 없어지니까 회사 다니려면 두 달짜리 방학을 버텨낼 재간이 없어요."

이처럼 현직 엄마는 전직 엄마에게 미안함을 느껴야 하는 구조다. 그리고 전직 엄마는 현직 엄마인 딸이 안쓰러워 어쩔 수 없이 돌봄을 맡는다. 이 역할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조부모 돌봄이 결국 체력 문제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동일 연구 결과 손자녀를 돌보는 조부모의 72%가 체력적 어려움을 호소했고 45.%는 돌보다 다치거나 병이 난 경험이 있었다. 0~1세 영아를 돌보는 할머니의 55%는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성 노인은 손자녀 돌봄뿐 아니라 배우자 등 가족까지 돌보는 다중 돌봄을 더 많이 맡는다. 그러다보니,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 역시 남성 노인보다 여성 노인에게서 더 크게 나타났다. 그럼에도 돌봄이 계속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부모 퇴근 전까지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워킹맘의 커리어 문제는 결국 여성 노인의 건강 문제로 이어진다. 일하는 딸의 비용이 어머니의 몸으로 전가되는 구조다.

정부와 지자체는 황혼육아 문제를 수당으로 보완하려 한다. 현재 일부 지자체가 지급하는 손자녀 돌봄수당은 월 20~30만 원 수준이다. 하지만 조부모들이 생각하는 적정 수당은 월 107만 원. 실제 자녀로부터 받는 금액도 평균 77만 원에 그쳤다.

외교관 친구가 딸에게 했던 말.

"여자는 공부해봤자 소용없다."

그 말은 체념이 아니라 이 숫자들을 온몸으로 살아낸 사람의 선언이었다.

숫자가 말하는 워킹맘의 수업료

2024년 국가데이터처 임금·근로 일자리 소득 분석 결과, 여성 직장인의 중위소득은 35~39세 311만 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40대부터 200만 원대로 떨어진다. 출산과 육아로 노동시장을 떠났다가 돌아온 여성의 임금은 이전 수준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반면 남성은 45~49세까지 479만 원으로 계속 상승한다. 45~49세 남녀 중위소득 격차는 213만 원으로 남성 479만 원, 여성 266만 원이다. 70세 이상이 되면 격차는 더 커진다. 남성 166만 원, 여성 58만 원.여성은 남성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여성의 출산 및 육아기 커리어 공백은 결국 노년여성의 빈곤으로 이어진다.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많은 여성이 출산 자체를 포기한다. 연구기관은 경력단절에 대한 두려움이 출산율 감소의 약 40%를 설명한다고 분석했다.

한국은 1992년 OECD 가입 이후 33년 동안 단 한 번도 '성별 임금 격차 1위' 자리를 다른 나라에 내준 적이 없다. 2024년 기준 성별 임금 격차는 24%. OECD 평균 11.3%의 약 2.6배다.

워킹맘의 수업료는 개인의 임금 손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비용을 사회 전체가 나눠 내고 있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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