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첫 모의고사, 안 자면 뭘 해도 좋다고 했더니...

서부원 2026. 3. 25.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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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나의 스승] 고1 새내기들의 생애 첫 전국연합 모의평가 응시날 풍경

[서부원 기자]

 AI생성 이미지
ⓒ 오마이뉴스
오전 8시 반이 다 되어가는 시간, 교문에서 뛰라며 다그쳐도 아이들의 걸음걸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느긋하기만 하다. 오늘은 고등학교에 올라온 뒤 처음으로 모의평가를 치르는 날이다. 8시 40분에 1교시 시험이 시작되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다들 만사태평이다.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1교시 시작 10분 전을 알리는 예비령이 울린다. 지각한 아이의 책상 위엔 이미 두툼한 국어 영역 시험지와 오엠아르 답안지가 놓여 있다. 그제야 시험일인지 알았는지 쭈뼛거리며 가방을 열어 주섬주섬 필기도구를 꺼내는 모습이 영락없는 초등학생 같다.

"선생님, 학교 번호가 뭐예요?"
"필적 확인란에는 뭘 적는 건가요?"
"컴사(컴퓨터용 수성 사인펜)를 안 가져 왔는데, 어떻게 하죠?"
"수정 테이프는 빌려 쓸 수 있나요?"
"시험을 볼 때 간식을 먹으면 안 되나요?"

조용해야 할 교실이 아이들의 질문에 소란스러워진다. 여태껏 단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시험 용어들이 낯설고, 시험일인데도 '컴사'조차 챙겨오지 않은 아이들이 여럿이다. 시작 전 오엠아르 카드에 이것저것 마킹하느라 쩔쩔매는 그들에게 감독교사는 순간 '유치원 선생님'이 된다.

1교시 본령이 울리고 왁자지껄했던 교실은 이내 차분해진다. 이따금 펜 떨어뜨리는 소리와 시험지 넘기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다만, 아이들의 일그러지는 표정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을 느낀다. 시험지의 한 면을 가득 채운 지문의 분량에 하나같이 놀란 표정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든다.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는 거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든다. 그만큼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 수능 시험장이라면 따질 게 많겠지만, 얼른 다녀오라고 토닥여준다. 1교시에만 24명 중 7명이나 됐다.

잠든 아이들이 태반인 2교시 시험시간

고1 새내기들에게 1교시 국어 영역이 낯섦과 긴장 속에 보낸 시간이었다면, 2교시 수학 영역은 인내와의 싸움이다. 당장 시험 시간부터 단일 교과 중 최장인 100분, 곧 1시간 40분 동안 수학 문제와의 사투를 벌여야 한다. 1교시의 긴장이 순간 풀리면서 더욱 힘든 싸움이 된다.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시험 시작과 동시에 네다섯 명이 책상 위에 바로 엎드리더니 20여 분이 지나자, 절반이 넘는 아이들이 도미노 넘어지듯 쓰러졌다. 종료령이 울릴 때까지 눈을 뜨고 있는 아이는 24명 중 8명에 불과했다. 힐끗 건너 본 옆 교실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1교시엔 들리지 않던 '작은 소음'이 들렸다. 한두 아이가 책상 위에 엎드린 채 코를 골았다. 주위에서 키득거릴 법도 하건만 교실엔 별 반응이 없었다. 열심히 시험 문제를 풀던 한 아이가 못마땅한 듯 고개를 돌려 힐끗 노려본 게 전부였다. 잠든 아이들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갓 고등학교에 입학한 새내기인데 '수포자(수학 포기자)'가 이미 절반도 훌쩍 넘어 2/3에 육박한 모양새다. 옆 교실에서 시험을 감독했던 동료 교사는 고3 교실인 줄 잠시 착각했다고 말했다. 이 정도의 '수포자' 행렬은 수능을 코앞에 둔 고3 교실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수능을 앞둔 고3 수험생들과 자습 시간 중에 '수포자'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또래 아이들이 대개 언제부터 수학 공부를 포기하게 되는지 물었다. 열에 예닐곱은 고2 때라고 답했고, 나머지는 고1의 1학기 성적을 받아 들고서 흥미를 잃었다고 했다.

'수포자'가 된 연령도 점점 낮아지는 걸까. 고1 첫 모의평가에서 고3 교실을 능가하는 '황폐한' 모습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맨 앞자리에 앉은 아이들 몇 명만 데리고 수업한 지 꽤 됐다는 수학과 동료 교사의 하소연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인내력을 시험한 100분짜리 시험이 끝나면 50분짜리 점심시간이다. 평소라면 허기져 급식소로 헐레벌떡 뛰어갔을 테지만, 적잖은 아이들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교실과 복도를 배회하고 있다. 시험을 망쳐서, 또 방금 잠에서 깨어 밥맛이 없다면서 오늘 점심은 건너뛰겠다고 한다.

하루 종일 시험을 치르는 경험이 처음일 테니, 시험 중간에 낀 점심시간이 어색할 법도 하다. 중학교 때는 오전에 시험을 끝내고 점심은 무조건 학교 밖에서 먹었을 테니 말이다. 특히 모의평가가 치러지는 날의 점심시간은 유독 짧게 느껴진다. 시험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잠만 자지 말라'고 했더니 벌어진 일

영어 듣기 평가로 오후 시험이 시작된다. 영어 영역 시험 70분과 한국사 영역 30분, 그리고 통합사회와 통합과학 영역이 각각 40분씩이니, 시험 시간만 180분, 곧 장장 3시간이다. 그나마 집중력이 남아있던 오전 시험보다 10분이 더 길다. 오후엔 졸음과의 싸움도 무시 못 한다.

어럽쇼. 듣기 평가조차 한 줄로 찍고 자는 아이들이 눈에 띈다. 경험으로 미루어 지금껏 '영포자(영어 포기자)'는 '수포자'보다 그 수가 현저히 적었는데, 그조차 옛말이 된 성싶다. 언뜻 봐도 별반 차이가 없다. 듣기 평가가 끝나도 일어날 줄 모르고 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언제부턴가 시험 감독교사의 업무가 바뀌었다. 시험 중 부정행위를 예방하는 건 차순위다. 컴사와 수정 테이프, 샤프 연필 등 시험용 필기구를 챙겨주는 것 역시 주요 업무가 아니다. 감독교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잠든 아이들을 깨워 다른 수험생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는 거다.

3교시 영어 영역 시험이 마무리될 때쯤이면, 교실은 두 '부류'로 확연히 갈라진다. 시험에 '목매단' 소수와 시험에 '자유로운' 다수로. 1교시와 2교시를 거치면서 기나긴 시험을 견뎌내는 아이들과 끝내 견뎌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마는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험에 '목매단' 소수의 책상 위에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초콜릿과 사탕이 놓여 있었다. 시쳇말로 '당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거다. 반면, 시험에 '자유로운' 아이들의 책상 위엔 두툼한 팔베개용 쿠션이 눈에 여럿 띄었다. 애초 시험에 응시하는 마음가짐부터 달랐던 거다.

실제 수능 시험장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일 테지만, 병든 닭처럼 힘없이 고꾸라지는 아이들을 부러 찾아가 흔들어 깨웠다. 그들에겐 시험 문제를 풀고 정답을 맞히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오지랖일진 몰라도, 시험 시간 내내 깨어 있도록 하는 것도 교육이 아닐까 싶었다.

그들은 몸을 배배 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답안지는 이미 마킹을 끝냈고, 시험지는 덮어버린 상태였다. 새 답안지를 건네며 다시 풀라고 채근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만사 귀찮다며 그냥 내버려두라는 눈빛이었다. 실랑이 끝에 잠만 자지 않으면 뭘 해도 좋다는 걸로 합의를 봤다.

이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몇몇 아이들이 시험지의 겉면을 뒤집더니 여백에 컴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 아이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을 흉내 냈고, 다른 한 아이는 역사 인물의 캐리커처를 신통방통하게 그려냈다. 방금까지 잠에 취했던 아이들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컴사는 붓이었고, 시험지는 도화지였다. 비록 그들은 '수포자'이면서 '영포자'였지만,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지닌 '인재'였다. 모의평가는 수학과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의 역량만 확인할 뿐, 자신의 재능을 발현하는 데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될 뿐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110분짜리 4교시를 앞두고 있다. 비록 시험 시간은 길지만, 세 과목을 번갈아 치러야 해서 지루함은 훨씬 덜할 테다. 그러나 아마 그 시간도 그들은 '무사하긴' 힘들 것이다. 애꿎은 시험 문제와 씨름하게 하는 대신에 차라리 그 시간 그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하면 어떨까 싶다.

그들은 시험일 내내 책상에 엎드려 잠자면서 무슨 꿈을 꿀까. 피곤함이 풀릴진 몰라도 시험에 대한 무력감만 켜켜이 쌓일 것이다. 이는 학교생활에 대한 부적응으로 이어지고 종국엔 자존감의 훼손으로 귀결된다. 그들에게 시험을 잘 봤냐는 그 흔한 인사말조차 건네기 조심스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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