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위미술서 전향… 틀을 깨고 나와 ‘점·선·면’의 즐거운 놀이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해온 원로 작가 이명미(76)는 동심과 유희의 화가다. 지난해 대구미술관이 주관하는 제26회 이인성미술상을 받았다. 수상자에게 주는 특전인 개인전이 올해 10월 열릴 예정이다. 그전에 우손갤러리 서울점과 대구점에서 동시에 진행하는 개인전을 통해 이명미 예술 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지난 5일 성북구 우손갤러리 서울점에서 열린 개인전 개막식에서 작가를 만났다. ‘얼마나 많은 이명미가 필요한가’라는 제목의 전시에는 파랑, 빨강, 노랑 등 원색으로 과감하게 칠해진 바탕 화면에 개와 고양이, 꽃과 별 등 동심을 건드리는 이미지들이 선으로 그려져 있다. 입체감은 없다. 바탕이든 형태든 붓질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고 개와 고양이, 의자 등 구체적인 이미지는 세모와 네모 등 기본적인 도형을 사용해 마치 유치원생이 그린 ‘못 그린 그림’ 같다. 심지어 글씨가 적혀 있기도 하다.
원색의 색감, 이미지의 단순함, 붓질의 즉흥성이 미술은 어렵다며 손사래 치는 사람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편안함을 준다. 나아가 삶에 대한 강렬한 생명력을 노래하는 그림에 살아갈 에너지까지 전해진다. 캔버스도 어떤 작품은 ‘고리타분한’ 직사각형의 틀을 벗어나 마름모, 원형이거나 직사각형이라면 2개 한 쌍으로 돼 있는 등 캔버스 자체가 재미를 준다.

이처럼 화가 이미지로 독보적인 지위를 굳힌 그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20대 시절에는 이건용, 김구림, 이강소 등 ‘실험미술 대가’로 불리는 선배들과 함께 전위미술 운동에 참여했다. 24세이던 1974년에는 1970년대 전위미술의 진원지 대구현대미술제의 창립 멤버이자 최연소 여성 작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실험미술 작가들은 서구의 개념미술 영향을 받아 회화도 조각도 아닌 설치미술, 대지미술, 행위예술 등을 추구했다. 이명미도 그 시절에는 그랬다. 캔버스 천을 찢기도 하고 파이프에 물감을 흘러 보내는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1974년 대구현대미술제 창립전에는 스펀지를 돌로 눌러 놓은 작업을 내놨다.
“그 무렵 일본에서 이우환 작가가 돌과 철판을 사용하는 ‘만남’ 작업을 선보였어요. 그의 작업은 당시 한국 미술계에는 폭탄이 터진 것처럼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문득, 돌을 사용한 내 작업이 그를 따라하는 것처럼 비치겠구나, 고유성이 부족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미술을 다시 시작하자는 생각에 그리기로 돌아왔습니다.”
회화로 돌아온 그는 가장 기본적인 조형 요소인 점·선·면을 가지고 그렸다. “어느 화랑에서 전시할 때 캔버스를 줄을 맞춰 걸지 않고 우연적인 선택에 따라 삐뚤빼뚤 걸었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이 재미있는 걸 캔버스 안에서 물감으로 구현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놀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시작한 작업을 모아 1977년 서울 그로리치 화랑에서 회화로 첫 개인전을 했다. 전시는 호평받으며 2년 후 일본 도쿄의 코마이 화랑에서 개인전을 할 수 있었다. 캔버스 안에는 별, 꽃이 나왔고 개와 고양이 등 동물을 의인화하거나 단순화시킨 이미지도 등장했다. 노래 가사를 적기도 했다. 이후 약 10년 전시한 개인전의 제목은 ‘놀이’였다.

마침내 1993년에는 도쿄화랑에서 한국 여성 작가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하는 기록을 세웠다. 도쿄화랑에서의 개인전은 각별하다. 1975년 이 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 전’이 남성이 장악한 한국 미술계의 주류 단색화(단색의 추상화)의 출발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 화랑에서 남성이 아닌 여성이, 그것도 단색이 아닌 ‘컬러풀’한 구상 회화로 개인전을 연 것이다.
또 구상 회화를 하지만 대상을 사진처럼 완전히 닮게 그리는 게 아니라 눙치듯 적당히 그린다. 눙치는 태도에서 여유와 해학이 묻어난다.
“억지로 참으면서 세밀하게 그리는 하이퍼 리얼리즘 그림을 저는 못합니다. 그리는 과정이 작가를 해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내 그림이 시대에 앞서거나 하는 그림이 아니라서 더 좋아요. 내 본능이 시키는 것을 하는 게 내 그림입니다.”
인공지능(AI)에 물어보니 이명미 작가를 이렇게 정의한다. “한국 현대미술의 주류였던 단색화와 개념미술의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놀이(Play)’라는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한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현대미술가”라고. 그 세계가 궁금하다면 전시는 9일까지.
글·사진=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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