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스퀘어 있는데 美에 또 AI 법인 왜?
SK그룹이 인공지능(AI) 투자 전략 재조정에 나서 주목된다. 지금까지 SK그룹에서는 SK하이닉스 최대주주 SK스퀘어를 중심으로 AI 투자를 벌려왔다. 최근 SK하이닉스가 미국에 설립 중인 AI 투자법인에 지주사 SK㈜와 SK이노베이션 등 주요 계열사가 줄줄이 출자를 결정하자 그 역할과 성격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온다.
미국 AI 법인 설립은 단순 투자 조직 신설을 넘어 메모리 중심 사업 구조에서 AI 인프라 전반으로 자산 배치와 역량을 조정하려는 전략적 전환으로 풀이된다. 공정거래법 지분 규제의 예외를 인정받아 미국 AI 법인을 중심으로 SK하이닉스 현금 창출력을 극대화하는 한편, 그룹에 분산된 각종 자산을 재배치하려는 포석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주요 계열사 줄줄이 출자
최근 SK그룹 주요 계열사가 잇따라 미국 AI 법인에 출자를 단행했다.
재계에 따르면, SK그룹 지주사 SK㈜는 ‘SK하이닉스 낸드 프로덕트 솔루션’에 2억5000만달러(약 3663억원) 투자를 결정했다. 앞서 SK이노베이션도 3억8000만달러(약 5567억원) 규모 출자를 확정했다. 두 계열사에서만 6억3000만달러(약 9230억원), 한화 약 1조원 가까운 뭉칫돈이 투입된다. 두 회사 모두 캐피털콜(자금요청) 방식으로 투자한다. 바로 투자금을 넣지 않고 향후 4년간 투자 요청이 있을 때 자금을 집행하는 방식이다.
이번 투자 구심점은 SK하이닉스가 100억달러(약 14조6500억원)를 출자해 미국 현지에 설립하는 ‘AI 컴퍼니(가칭 AI Co.)’다. 올 1월부터 SK하이닉스는 미국 ‘SK하이닉스 낸드 프로덕트 솔루션’을 ‘AI 컴퍼니’로 전환 중이다. 이를 위해 ‘SK하이닉스 낸드 프로덕트 솔루션’은 낸드 플래시 메모리와 SSD 사업을 신설법인 솔리다임(Solidigm Inc.)에 이전했다. 지배구조가 SK하이닉스 → SK하이닉스 낸드 프로덕트 솔루션(AI 컴퍼니) → 솔리다임으로 이어진다. 기존 자회사 솔리다임 구조를 뜯어고쳐 모회사(SK하이닉스)를 AI 투자 총괄 법인으로 탈바꿈시킨다.
SK그룹 AI 투자 관련 지배구조도 큰 변화를 맞는다. 현재 SK그룹은 최태원 회장 → SK㈜ → SK스퀘어(투자 중간지주) → SK하이닉스를 거쳐 AI 인프라 투자(HBM·데이터센터·AI 스타트업)가 이뤄진다. 이는 SK스퀘어를 중심으로 한 중간지주형 투자 체계에 가깝다. SK스퀘어는 SK하이닉스 지분을 핵심 자산으로 AI 인프라 투자에서 구심점 역할을 한다. 이외 ▲SK텔레콤이 AI 서비스와 데이터 활용 ▲SK이노베이션·E&S가 데이터센터·전력 인프라 ▲SK AX가 소프트웨어 기반 AI 전환 등 AI 가치사슬에 분산 참여한다. 미국 AI 투자법인 설립으로 지배구조는 SK㈜ → SK스퀘어(중간지주) → SK하이닉스(손자회사) → 미국 AI 컴퍼니(증손회사)로 바뀐다.
美 AI 법인 설립 배경은
자금 다변화, 투자 민첩성 확보 등
SK그룹이 SK스퀘어라는 투자 플랫폼을 이미 보유하고 있지만, 미국 AI 투자법인 설립에 나선 배경으로 몇 가지 요인이 지목된다.
첫째, 자금 조달 전략 다변화다.
SK하이닉스는 유례없는 ‘하이퍼 불(Hyper Bull·초강세장)’로 막대한 현금을 벌어들이지만, 나가야 할 돈도 천문학적이다. 문제는 공정 미세화, 물가 상승 등으로 필요 자금이 눈덩이처럼 불고 있다는 점이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 규모만 600조원 정도다. 이는 당초 120조원보다 약 5배 늘어난 수준이다. 이외 국내 이천과 청주, 미국 인디애나주 등 투자도 동시다발적으로 병행한다. 제아무리 현금 창출력이 뛰어난 SK하이닉스라고 해도 다양한 자금 조달 전략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미국 AI 법인 설립과 주식예탁증서(ADR) 상장 추진이 서로 맞물린 것도 이런 사정이 깔려 있을 것으로 시장은 바라본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3월 16일(현지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열린 엔비디아 연례 개발자 콘퍼런스 ‘GTC(GPU Technology Conference) 2026’에서 기자들과 만나 “SK하이닉스의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상장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한국 주주들뿐만 아니라 미국과 글로벌 주주들에게 노출될 수 있어 더 글로벌한 회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 ADR 상장은 SK하이닉스가 AI 인프라 기업으로 재평가받고 향후 자금 조달 여력을 키우는 기반이 될 수 있다. SK하이닉스는 현재 자사주 매입 보단 신주 발행 방식을 신중하게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현금창출력이 최고조에 달한 만큼 미국 시장에서 대규모 증자는 기존 주주가치가 희석될 수 있다는 점이 우려 요인이다. 국내 기업이 택한 ADR은 대부분 기존 국내 주식을 기반으로 한다. 한국 상장 주식을 예탁해 이를 미국에서 ADR 형태로 거래하는 식이다. 기존 주식을 기반으로 한 ADR 상장일 경우 신규 자금이 유입되지는 않는다.
향후 SK하이닉스 산하 미국 AI 법인도 글로벌 자본 접근성을 높여 투자 여력을 크게 확대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평가다. ▲빅테크와 공동 투자 ▲AI 스타트업 인수합병(M&A) ▲데이터센터 인프라 투자 등을 현지에서 신속하게 집행하는 역할을 맡는 식이다.
둘째, 투자 민첩성 확보다. SK스퀘어는 상장 투자회사이자 중간지주 성격을 동시에 지녔다. 주주환원 압력과 공시 의무, 지주회사 규제 틀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대규모 투자에는 이사회 승인과 공시가 수반되고 투자 방향이 단기 실적과 주주환원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해야 한다. 기술 불확실성이 큰 AI 산업은 투자 속도와 의사결정 민첩성이 경쟁력을 좌우한다. 별도 미국 투자법인은 이사회·주주 절차 등으로 몸이 무거운 SK스퀘어와 달리, 글로벌 빅테크, 스타트업과 협력·투자를 신속하게 집행할 수 있는 투자 플랫폼으로 평가된다. 한동희 SK증권 애널리스트는 “미국 증시에 주식예탁증서(ADR)로 상장하는 방안이 가시화될 경우 SK하이닉스 저평가는 더 부각될 것”이라 봤다.
셋째, 지주회사 규제 부담 완화다.
지주회사 체제 아래 국내에서 AI 투자법인을 설립할 경우, 공정거래법 지분 규제를 적용받는다. SK㈜-SK스퀘어-SK하이닉스로 이어지는 구조에서 SK하이닉스(손자회사)가 신규 법인(증손회사)에 출자할 경우 공정거래법상 손자회사는 증손회사 지분 100%를 보유해야 한다. 공정거래법은 지주사 체제 아래 자회사와 손자회사의 국내 계열사 주식 보유를 엄격하게 규제한다. 이 탓에 다른 계열사가 함께 지분을 나눠 갖는 공동 투자 구조를 설계하기 매우 까다롭다. 이런 제약은 복수 출자자와 자본을 결합해 위험을 분산해야 하는 AI 산업에서 의사결정 유연성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미국 법인을 활용하면 공정거래법 지분 규제 적용을 피할 수 있다는 게 SK그룹 판단이다. 공정거래법은 ‘국내 계열사’를 중심으로 출자 제한을 요구하므로, 국외 증손회사(미국 AI 투자법인)에는 ‘지분 100% 보유’ 규제 예외를 적용 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현재 지배구조 틀 안에서는 SK하이닉스를 대신해 SK스퀘어 중심으로 공동 출자 구조를 짜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정거래법은 계열사들이 얽히고설킨 지분으로 복잡한 지배구조를 만드는 것을 막으려 상호 교차 투자를 제한한다. 미국 등 해외 법인을 활용하면 출자 규제를 피해 공동 투자 구조를 설계할 수 있어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평가다.
다만, SK스퀘어와 역할 중첩 우려를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SK스퀘어가 SK하이닉스를 기반으로 AI·반도체 투자 확대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유사 정체성을 가진 별도 법인이 등장하면 그룹 내 자본 배분과 의사결정이 중첩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투자 영역과 의사결정 체계를 얼마나 명확히 분리하느냐가 핵심 변수가 될 것”이라 봤다.

장비 임차 등 활용도 높을 듯
미국 AI 법인 활용도와 시너지에 관해서도 기대 섞인 전망이 나온다.
우선, 글로벌 파트너십 강화다. AI 산업은 가치사슬이 광범위하고 복잡해 특정 기업이 단독으로 주도하기 어렵다. SK그룹이 HBM 공급자(SK하이닉스)를 넘어 데이터센터, 시스템 아키텍처, AI 소프트웨어로 영역 확장 과정에서 미국 투자법인이 글로벌 네트워크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다. 공동 투자, 전략적 지분 참여, 기술 협력 등을 통한 지식 이전 효과(Knowledge-Spill Over)로 SK하이닉스 고객 기반과 시장 지위 강화도 기대할 수 있다.
투자은행(IB) 업계에서는 미국 AI 투자법인이 회사채 발행, 은행 차입, 외부 투자 유치 등으로 자금을 조달한 뒤 공장과 장비를 직접 보유하고 이를 SK하이닉스에 임대하는 구조도 가능할 것으로 내다본다. SK하이닉스는 국내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천문학적인 설비투자를 벌인다. 특히, 수십조원이 소요되는 팹(Fab) 증설 비용을 한 번에 투입하기보다 장기간 임차료로 분산하는 방식은 초기 현금 부담을 낮추고 투자 타이밍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시장에서는 핵심 장비나 데이터센터 인프라 등 특정 자산에 한정된 형태로 임차 구조가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IB 업계 관계자는 “리스 구조를 활용하더라도 사용권자산과 리스부채가 동시에 인식되기 때문에 재무 부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자금 집행 시점을 분산하고 외부 자본을 결합해 투자 리스크를 분산할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분석했다.
재계와 시장 일각에서는 SK그룹 각 계열사에 분산돼 있는 AI 관련 자산을 미국 법인 아래 한데 모을 가능성도 점친다. SK그룹은 과거 저금리 시절 공격적으로 투자 자산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다수 재무적투자자(FI)를 끌어들였다. 금리가 급등하고 업황이 고꾸라지자 계열사 곳곳에 주요 주주로 이름을 올린 재무적 투자자는 골칫거리가 됐다는 평가다. 속도감 있는 사업 재편을 하려 해도 이들 동의 없이는 속 시원한 의사결정이 쉽지 않다. 그룹에 흩어져 있는 AI 관련 자산을 미국 법인에 넘겨 관리 주체를 일원화한다면, 자산을 넘긴 계열사는 재무 부담을 덜고 사업 재편도 속도를 낼 수 있다. SK하이닉스도 잠재력 있는 자산을 외부로 넘기지 않고 내재화해 활용도를 높일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SK하이닉스 곳간을 계열사 우회지원에 쓰는 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시선을 불식하는 게 과제로 지목된다.
한화그룹이 비슷한 사례로 꼽힌다. 지난 연말 한화그룹은 ▲한화솔루션이 한화퓨쳐프루프 지분 50%를 신설 해외법인에 매각하고 ▲한화오션·한화시스템은 각각 해외법인을 거쳐 신설회사 증자에 참여해 ▲한화솔루션이 8500억원을 확보했다. 형식적으론 한화오션·시스템이 한화솔루션 보유 자산을 사들인 구조였지만, 계열사 우회지원이라 문제 삼기 모호한 대목이 많았다는 평가다. 금융투자 업계 관계자는 “실질적으로 투자 결정을 내린 건 미국 현지 법인이었으므로, 계열사 우회지원으로 보기는 힘들다. 상법 개정이 이뤄지면서 우회로를 고민하는 대기업이 많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최재원 수석부회장의 미국 AI 법인 합류 가능성도 점친다. 현재 최 수석부회장이 거쳐간 곳 성과가 악화일로를 걸어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럼에도 최 수석부회장이 기술 이해도가 높고 경영 전문성과 글로벌 인적 네트워크 등을 갖췄다는 점은 의사결정 기여도를 높일 요인으로 평가된다.
재계 관계자는 “초기에는 임시 경영진과 이사회를 꾸린 뒤 미국 현지에서 전문성과 이해도를 갖춘 전문가 중심으로 조직을 구성할 것”이라며 “최 수석부회장이 합류한다면 오너가로서 SK스퀘어와 SK하이닉스 간 투자 전략 조율과 실행에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라 봤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52호(2026.03.25~03.3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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