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 한복판에 이게 뭐지? 주민들이 쉴 새 없이 들어갔다
[이인자 기자]
4년 전 쯤이었을 것이다. 모처럼 친정 엄마와 서울 강동구 천호동 고분다리시장에서 장을 보던 날이었다. 엄마의 단골 기름집에서 볶은 참깨를 사고, 시금치 한 단을 사고, 고등어 한 손을 사러 가던 길이었다.
비릿한 생선 냄새와 시끌벅적한 흥정 소리가 뒤섞인 시장 통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공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얼핏 보면 세련된 카페 같았지만, 자세히 보니 도서관이었다. 세상에, 이 소란스러운 시장 골목 한복판에 도서관이라니. 마치 뚝배기들 사이에 머그컵 하나가 놓인 듯한 모양새였다.
그 순간, 세파에 찌든 내 머릿속에는 두 가지 삐딱한 생각이 스쳤다. 세상 물정 모르는 이가 열정만으로 차렸거나, 애서가 건물주의 자아실현 쯤 되거나. 하지만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생각이었다. 입구에 적힌 이름은 '다독다독'. 강동구에서 운영하는 구립 북카페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에서 일한다는 사람이 그것도 알아보지 못했다니, 괜스레 민망해졌다.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다. 마치 중력에 이끌리듯 장바구니를 든 몸이 도서관 입구로 쏠리던 찰나였다. 엄마의 한마디가 나를 막아섰다.
"빨리 시장 보고, 냉면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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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독다독 북카페 도서관 고분다리시장점 시장 안에 도서관이 있다고? |
| ⓒ 이인자 |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장 먼저 놀라웠던 것은 고요함이었다. 시끌벅적한 시장통 소리들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공간도 넓었다. 밖에서 볼 때는 열 평 남짓 될 거라 짐작했는데 안으로 들어와 보니 훨씬 여유가 있었다. 사람들도 제법 북적북적거렸다.
먼저 가벼운 마음으로 도서관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밀도 있게 정렬된 서가, 다양한 전시 코너와 월별 프로그램까지 이용자들을 위한 도서관의 진심이 그 공간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성인들을 위한 '만화서가'도 그 진심 중 하나였다.
공공도서관이라는 체면을 내려놓고 만화책들을 독립된 서가로 당당히 배치한 건, 이용자의 즐거움을 위한 생각일 것이다. 그 서가를 보며 문득 일전에 본 한 남학생이 떠올랐다. 수능을 마친 뒤에도 도서관을 찾았던 학생이었다. 공부하다가 지치면 서가 사이를 서성이곤 했다. 이런 공간이 있었다면, 그 학생도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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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즈존 알록달록 예쁜 키즈존 |
| ⓒ 이인자 |
그날 도서관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LP판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음악을 들을 때였다. LP판 때문인지 북카페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북 '살롱' 같은 레트로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듣고 싶은 LP 음반을 데스크에 신청하면, 턴테이블과 헤드셋이 갖춰진 자리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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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P판과 턴테이블 음악과 시집으로 충전하는 시간 |
| ⓒ 이인자 |
나는 천호동의 좁은 골목이 키운 아이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그 길들은 우리의 광활한 놀이터였다. 그곳은 좀처럼 정복 되지 않는 미로였다. 가끔 길을 잃고, 막다른 길에 갇히기도 했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동안 익힌 몸의 감각들이 원래 있던 골목으로 무사히 데리고 갈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동과 호수로 길을 익혔다면, 골목에 사는 우리는 길을 몸으로 기억했다.
도서관의 서가 사이를 걷다 보면, 가끔 어린 시절 거닐던 골목길이 생각났다. 비슷한 대문과 지붕이 각기 다른 사람들을 품고 있듯이, 비슷하게 보이는 책들 속에도 저마다 다른 이야기들을 품고 있었다.
책은 새로운 골목으로 향하는 길
책은 곧 길이었다. 막다른 골목 안에 갇혔을 때 책은 새로운 골목으로 향하는 길이 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다독다독' 고분다리시장점 같은 도서관을 더 많은 골목 사이에서 만났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새로운 골목으로 향하는 길을 만날 테니 말이다.
집 근처에 도서관이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축복이다. 그것만으로도 그 동네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일까. 이날, 이 도서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마치 이 도서관 때문에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어느새 시장 골목은 저녁거리를 사러 나온 사람들과 상인들의 목소리로 더 활기를 띠었다. 도서관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은 나가고, 바깥 소리만이 밀려 들어왔다. 밀려온 소리 중에는 우리 엄마의 목소리도 있는 듯했다. 어느덧 마늘과 간장 속에서 멸치가 뒤척이는 냄새도 코에 가득 고였다. 청각과 후각이 시간을 잊은 모양이다.
4년 전 냉면을 먹으러 가자던 엄마는 이제 냉면이 맛있는 줄 모르겠다고 하신다. 엄마의 잔소리보다 내가 엄마에게 하는 잔소리가 더 늘어났다. 노상에 펼쳐진 채소들은 봄바람을 맞은 탓인지 잎사귀들이 시들시들해 보였다. 엄마에게 요즘 유행한다는 봄동 비빔밥이라도 만들어 드릴까 싶어 봄동 한 소쿠리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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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장 야채코너 봄동을 만나다 |
| ⓒ 이인자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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