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니, 스스로 판돈 높인 국민투표에서 좌초…집권 3년 만 정치적 타격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전면에 나서 공들인 사법개혁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며 집권 이래 쌓아온 무적 이미지에 균열이 났다. 이란 전쟁으로 세계정세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여기에 동조하던 우파 포퓰리즘에 대해 견제 심리가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지난 22~23일(현지시간) 멜로니 정부가 추진한 사법개혁안의 국민투표에서 반대가 54%로 찬성 46%를 웃돈 것으로 집계됐다. 투표율은 역대 최고치인 58.5%를 기록했다. AP통신은 "양극화된 분위기 속에서 투표율이 승패를 좌우했다"고 전했다.
이번 국민투표의 쟁점은 원래 사법제도 개편이었다. 같은 체계 안에서 운영돼 온 판사와 검사의 진로를 분리하고, 사법부의 임용·승진·징계를 담당하는 독립 기구 최고사법위원회(CSM)도 이원화하는 방안 등이 담겼다. “정치화된 사법 카르텔을 끊고 책임성과 중립성을 높이는 개혁”이라는 게 멜로니 정부의 주장이었다. 판·검사 간 유착으로 형성된 분파주의를 끊고 재판 중립성을 확보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반대 진영은 "행정부가 검찰과 법원을 더 쉽게 압박할 수 있는 길을 열 것"이라고 반박했다. 사법부 전체를 대변하던 강력한 자치 기구 CSM의 힘을 빼고 검사 조직을 행정부인 법무부 지휘 통제 아래 놓겠다는 의도 아니냐는 의미다. 행정부에 더 큰 권한을 줘 권력 분립을 해칠 수 있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번 투표는, 사실상 2027년 총선을 앞둔 멜로니 정부에 대한 신임투표가 됐다는 것이 외신의 평가다. 막판 박빙 구도가 형성되자 멜로니가 찬성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AP통신은 "멜로니가 사법부 때리기에 나서면서 이번 투표의 판돈을 높였다"고 지적했다.
실제 멜로니 총리는 "더욱 강력한 세력, 더욱 무능한 판사들, 더욱 비현실적인 판결 그리고 이민자와 강간범, 소아성애자, 마약상들이 풀려나 여러분의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이런 선동적 수사가 오히려 역풍을 초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마티아 딜레티 로마 사피엔자대학 정치학 교수는 가디언에 "본질적으로 멜로니와 판사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으로 흘렀다"고 말했다. 유권자 중 상당수가 개혁안의 실질적 내용보다 멜로니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반대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멜로니 총리로선 2022년 10월 취임 이후 각종 선거에서 세워온 연전연승 기록에 흠집이 났다. 분열된 중도좌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보수 진영에 맞서는 광범위한 연합이 구축될 수 있다고 로이터통신은 내다봤다.
일각에선 '트럼프 리스크'가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도 있다. 이란 전쟁을 둘러싼 이탈리아 국민의 반대 여론이 높아지면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인 멜로니 총리에 불똥이 튀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전쟁 후폭풍으로 에너지 가격 상승에 민감해진 유권자들이 멜로니를 트럼프 대리인으로 심판대에 올렸다는 뜻이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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