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놀라운 총선 결과... 우리도 '30년 잔혹사' 끝내자 [이봉렬 in 싱가포르]
[이봉렬 기자]
지난해 5월, 싱가포르에서는 총선이 열렸습니다. 이 결과는 여성의원 비율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총 33개 선거구에서 선출된 97명의 의원 중 31명이 여성으로 채워졌습니다. 2006년 21.4%였던 여성 의원 비율은 선거를 거듭하며 꾸준히 상승해 32%에 도달했습니다. 이는 OECD 평균인 33.8%에 육박하는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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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싱가포르의 한 집단선거구의 국회의원들. 선거구별로 최다 득표 정당이 해당 선거구의 의석 전체를 다 가져가기 때문에 이 선거구의 경우 여성 의원이 자동으로 2명 배출됩니다. |
| ⓒ SINGAPORE PAP |
인구의 절반이 여성이라면, 그들을 대표하는 정치인 역시 그에 걸맞은 비중을 차지해야 대의민주주의의 대표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회적 합의가 작동한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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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범여성계 단체 회원들이 성차별 해소를 위한 개헌을 촉구하는 모습. 2018.3.19. |
| ⓒ 연합뉴스 |
우리 공직선거법 제47조 제4항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후보를 추천할 때 100분의 30 이상을 여성으로 추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권고 조항은 현장에서 사실상 사문화되었습니다.
지방자치단체로 눈을 돌리면 상황은 더 참혹합니다. 1995년 민선 지방자치가 실시된 이후 30년이 흐르는 동안 대한민국에서 여성 광역단체장은 단 한 명도 배출되지 않았습니다.
전국 226곳의 기초단체장 역시 지난 선거 당선자 중 여성은 고작 일곱 명(3.1%)에 불과합니다. 이들조차 대부분 수도권 지역이며, 특정 정당 공천이 곧 당선으로 이어지는 영·호남 지역에는 여성 기초단체장이 전무합니다. 이는 소위 당선 안정권 지역의 기득권을 남성 정치인들이 독점해 왔음을 의미합니다.
올해 6월,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둔 지금, 변화의 조짐이 보일까요? 각 정당의 공천 상황을 보면 여전히 회의적입니다. 민주당의 경우, 경선이 진행 중인 서울에 전현희 예비후보가, 경기도에 추미애 예비후보가 있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인천, 울산, 강원, 경남 등 지역의 단수 공천 혹은 경선 대상자들은 모두 남성입니다. 국민의힘 역시 공천이 확정된 곳은 남성 후보로 채워졌습니다(경선의 경우, 김수민 예비후보가 충북지사 경선을, 윤희숙 예비후보가 서울시장 경선을 치르게 됩니다).
이렇게 여성 후보가 없으니 지난 30년 동안 단 한 명의 여성 광역단체장도 없었던 겁니다.
되풀이되는 여성 가산점 논란, 제도의 본질을 묻다
지방 선거에서 여성 후보를 보다 많이 배출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가 있긴 합니다. 여성 가산점 제도입니다. 민주당의 경우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와 성별 균형 및 대표성 보장을 위해 2019년부터 여성 후보에게 10~25%까지의 가산점을 주고 있습니다. 여성 신인의 경우 25%의 가산점을 받지만, 전·현직 국회의원 등은 10%의 가산점만 적용받습니다.
하지만 지방선거를 앞둔 지금, 공천 과정에서 다시금 이 여성 가산점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습니다. 더불어민주당 경기도지사 경선에 나선 추미애 예비후보에게 부여되는 가산점을 두고 당내 일부에서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입니다. 선두 다툼이 치열하다 보니 중량감 있는 다선 정치인에게까지 가산점을 주는 것은 과도하다는 목소리가 큽니다.
그러나 정치권의 가산점 제도는 특정 개인에 대한 혜택이 아닙니다. 중년 남성 중심의 인적 구성이 고착화된 정치 구도를 깨고 여성, 장애인, 청년 등 구조적으로 진입 장벽에 부딪히는 계층의 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사다리입니다. 특정 시기, 특정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해서 걷어낼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전국 광역단체 후보군 중 여성의 이름을 찾기 힘든 이 척박한 현실에서, 제도적으로 보장된 가산점에 시비를 거는 것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방치하겠다는 기득권 중심 사고의 이면일 수 있습니다. 가산점 논란은 역설적으로 우리 정치권이 여성 정치인의 성장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벽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싱가포르가 인위적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제도를 통해 소외된 목소리를 정치권으로 끌어들였듯, 우리에게도 이제는 단순한 권고를 넘어선 제도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극심한 성비 불균형을 해소하고 여성 행정 수장의 역량을 증명할 기회를 넓히기 위해서는 지금의 논란을 소모적인 갈등이 아닌, 제도 안착을 위한 공론화의 과정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지금보다는 더 많은 여성 행정가를 만날 수 있길 기대합니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의 비율만큼은 아니더라도, OECD 국가 평균만큼은 아니더라도, 30년 동안 여성광역자치단체장이 전무한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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