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들을 수 없는 아이가 함께 손을 뻗어 닿은 곳은

김용현 2026. 3. 2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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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복지재단 헬렌켈러센터 ‘2026 시청각장애아동 교육 국제세미나’ 열어
“장애를 고정된 상태로 이해하고 포기하는 순간 성장은 멈춰”
시각과 청각 장애를 중복으로 가진 전맹 유아가 교사의 도움을 받아 사다리에 올라가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를 직접 만져보고 있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인지하게 하는 교육의 한 장면이다. 밀알복지재단 제공

선천성 시청각장애를 가진 일본의 아츠시 모리가 과거 맹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병원의 의학적 판정은 ‘발달 불가능’이었다.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어 기계적 검사에 반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장의 교사들은 병원의 진단 결과를 근거로 교육을 중 않았다. 소통의 통로를 아직 찾지 못했을 뿐, 아이의 내면에는 아직 열리지 않은 세계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 아이의 세계를 열기 위해 5명의 교사가 한 팀으로 투입됐다. 이들은 지식을 주입하는 대신 쌀을 만지고 씻는 것부터 밥솥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의 뜨거움을 느끼는 과정까지, 일상의 전 과정을 직접 경험하고 인지하게 했다. 수년간의 교육 끝에 아츠시는 일본 한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밀알복지재단 헬렌켈러센터 홍유미(왼쪽) 센터장이 23일 서울 영등포구 이룸센터에서 열린 '2026 시청각장애아동 교육 국제세미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그 오른쪽은 이번 세미나의 주 강연자인 호시 유코 요코하마 훈맹학원장.

23일 서울 영등포구 이룸센터 누리홀에서 KSD나눔재단 후원으로 열린 ‘2026 시청각장애아동 교육 국제세미나’에서 강연에 나선 호시 유코 요코하마 훈맹학원장(일본 국립특별지원교육종합연구소 특별연구원)은 지난 30여년간 교육 현장과 국가 실태조사를 이끌어온 경험을 바탕으로 “장애를 고정된 상태로 이해하고 포기하는 순간 성장은 멈춘다”며 “가능성을 믿고 다가가는 한 사람의 관심이 있다면 아이는 반드시 변화한다”고 말했다.

요코하마 훈맹학원은 1889년 미국 감리교 소속 샬럿 드레이퍼 선교사가 설립한 곳으로,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기독교적 가치를 바탕으로 현재 일본 내에서 유일한 사립 시청각장애 교육기관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시청각장애 학생을 교육하고 있다. 일본의 공교육 내 시청각장애 교육은 1948년 야마나시현에서 공식적으로 시작돼 올해로 78년이 됐다.

“산의 나무는 누가 물을 주나요?”… 경험이 곧 세상이 되는 아이들

일본 국립특별지원교육종합연구소(NISE)의 2023년 시청각장애아동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아동의 25%는 시·청력 모두 의학적으로 ‘측정 불가’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현장의 교사들은 이 진단에 갇히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시력이 전무하다고 했지만, 식사 시간에 노란 오므라이스 위의 빨간 케첩을 가만히 응시하는 아이의 미세한 반응을 포착해 시각 교육을 다시 시작하고 결국 문자를 깨치게 하기도 했다.
시청각장애 아동이 교사를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네임 사인(Name Sign)'의 예시. 시각과 청각이 단절된 아이들을 위해 교사들은 팔찌, 머리끈, 질감이 다른 비즈 등 고유한 촉감을 가진 물건을 자기소개 도구로 활용한다. 밀알복지재단 제공

시청각장애 아동에게 세상은 직접 체험한 것만으로 이뤄져 있다. 학교 화단에 물을 주는 교직원을 인지한 아이가 교사와 등산을 하며 나무를 만져본 뒤 “그럼 이 산의 많은 나무는 누가 물을 주느냐”고 묻거나, 동화책을 읽고 “너구리는 어떻게 말을 하느냐”고 묻는 식이다. 나무에 비가 내리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상상과 추상 그리고 현실에 대한 구분이 불분명하기도 하다.

하나의 사물을 가르치는 것은 곧 경험이고 배려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낯선 물건을 만지는 것은 아이에게 극도의 공포다. 교사들은 억지로 아이의 손을 끌어당기는 대신, 교사의 손등 위에 아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얹어 안전함을 느끼게 한 뒤 함께 세상을 탐색한다. 교사가 고유의 팔찌나 수염을 만지게 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는 ‘네임 사인’, 숟가락을 쥐여주며 식사 시간을 예고하는 ‘오브젝트 큐(실물 제시)’ 등은 모두 고립된 아이를 세상과 연결하는 섬세한 소통의 통로다.

서류엔 ‘시각장애’ 없다며 지원 제한…1만명 추정치엔 없는 사각지대

한국의 제도는 여전히 시청각장애를 ‘중복장애’라는 서류 칸막이 안에 가두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국내법상 시청각장애인은 시각과 청각 중 본인에게 유리한 장애 하나를 ‘주 장애’로 선택해 등록해야 한다. 홍유미 밀알복지재단 헬렌켈러센터장은 “청각장애를 기반한 시청각장애인이 원거리 소통을 위해 점자 정보 단말기를 신청했다가, 주 장애가 청각이기 떄문에 지원 대상이 아니라고 탈락하는 일이 빈번하다”며 “시각과 청각이 모두 차단돼 보완 수단이 없는데도, 제도는 이를 개별 장애의 단순 합으로만 보면서 지원 기회를 제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호시 유코 요코하마 훈맹학원장이 일본 현지의 시청각장애 아동 교육 사례 영상을 소개하며 강연하고 있다. 모니터 속 영상은 아이가 운동 후 가빠진 호흡을 통해 ‘어깨로 숨을 쉰다’는 관용구를 몸으로 직접 배우는 장면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중복 장애를 등록할 실익도 사라졌다. 추가 장애를 등록하려면 개인이 검사비를 부담해야 하지만, 등록해도 얻을 수 있는 복지 혜택이 거의 없어 많은 이들이 등록 자체를 포기하기 때문이다. 결국 시청각장애인 1만명으로 추산한 보건복지부의 통계에는 이들의 실태가 잡히지 않는다. 사각지대에 방치된 이들을 위한 전수조사가 필요한 실정인 셈이다.

20명의 아이와 6명의 직원… “가장 낮은 곳을 향한 공감”

제도의 빈틈을 현장에서 메우고 있는 곳이 보건복지부 시청각장애인지원 전담기관으로 인정받은 밀알복지재단의 헬렌켈러센터다. 2019년 시작한 이 센터는 현재 20명의 시청각장애 아동에게 1대1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1992년부터 밀알선교단에서 활동해 온 홍 센터장은 “주먹을 꽉 쥐고 세상을 거부하던 아이가 손을 펴 사물을 잡고, 자해가 심했던 아이가 가족과 함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며 “예산은 늘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필요한 순간마다 공급해주시는 것을 경험하며 2019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걸음을 멈춘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전국의 시청각장애 아동을 지원하는 이 센터의 전담 직원은 6명에 불과하다. 정형석 밀알복지재단 상임대표는 “가장 소외된 장애인들에게 다가가는 일을 재단에서 해야한다는 소명을 따라 이 길을 시작했다”며 “시청각장애 아동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지극히 작은 자들’이라고 본다”이라고 말했다.

헬렌켈러센터 관계자들과 세미나 참석자들이 ‘2026 시청각장애아동 교육 국제세미나’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밀알복지재단 제공

센터는 올해 중순 국내에선 처음으로 ‘시청각장애아동 촉감교육 매뉴얼’을 발간한다. 현장의 교사와 부모들이 아이의 미세한 신호를 포착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실질적인 가이드라인이다. 나아가 시청각장애를 독자적 장애 유형으로 인정하는 ‘한국판 헬렌켈러법’ 제정과 전국 단위의 권역별 지원 거점 신설을 향후 핵심 과제로 삼고 있다.

정 대표는 “가장 소외된 이들 곁에 머무는 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응답”이라며 “가장 낮은곳에서 소외된 이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튼튼한 제도를 만들고, 그 작은 손을 잡아주는 일에 한국 교회가 먼저 함께해주길 호소드린다”고 말했다.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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