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길 웃음 터지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제주 오름

전갑남 2026. 3. 23.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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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봄 기행 7] 따라비 오름, 세 개의 분화구와 억새 바다가 건네는 평온한 위로

3월 3일부터 3월 9일까지 제주를 여행했다. <기자말>

[전갑남 기자]

제주의 진짜 매력은 땅의 높낮이가 만들어낸 '오름'에 있다. 제주를 찾을 때마다 마치 숙제처럼 한두 군데의 오름을 오르곤 한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인 '따라비오름'을 향하며 문득 의문이 생겼다. 대체 이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지형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수만 년 전, 뜨거운 용암이 지표를 뚫고 솟구쳤을 것이다. 한 번의 폭발로 끝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기에 일어난 여러 번의 분출이 겹치고 설키며 세 개의 분화구를 빚어냈으리라. 식어버린 용암 위로 세월의 퇴적물이 쌓이고, 바람이 날아온 씨앗들이 뿌리를 내려 지금의 부드러운 능선을 완성했을 터였다.

대지의 격렬한 산통 끝에 태어난 이 곡선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이토록 평온한 위로를 건네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경이롭게 다가왔다. 아침에 일어나 일기예보를 살피니, 3월의 제주 날씨는 역시 변덕쟁이다. 아침 기온은 낮고 바람이 심하다고 한다. 그래도 제주의 바람에 맞서 땅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따라비오름을 만나기 위해 채비를 서둘렀다.

"비 소식은 없네. 다행이야. 옷만 단단히 챙기자고."

호젓한 길 끝에서 마주한 곳
 독특한 지그재그 진입로와 '쫄븐갑마장길' 이정표가 인상적인 따라비오름 입구. 여느 오름에서 볼 수 없는 이색적인 모습이었다.
ⓒ 전갑남
도착한 오름 입구는 무척 특이했다. 가축의 출입을 막기 위해 지그재그 형태로 엇갈려 놓은 독특한 진입로가 우리를 먼저 반겼다. 이 좁은 입구를 통과하며 우리는 본격적으로 오름의 품에 발을 들였다.

숲속 산길에 접어들자 기세등등하던 바람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오름의 굴곡이 천연 병풍이 되어준 모양이다. 이어서 나타난 나무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오른다. 제법 경사가 있었지만, 차가운 공기 덕분에 등 줄기에 적당히 배어 나오는 땀이 오히려 기분 좋게 느껴졌다.

오르다 문득 아내에게 '따라비'라는 이름에 담긴 사연을 물었다. 이 오름은 주변의 모지오름, 장자오름 등과 어우러져 한 가족을 이룬다. 그중 가장 어른 격이라 하여 '따애비(아버지)'라 부르던 것이 '따라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산(山)을 뜻하는 '달'에 할아버지를 뜻하는 '아비'가 합쳐져, 제주 땅의 할아버지를 뜻하는 '다라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정상 부근 이정표 앞에서 만난 북쪽 정상을 가리키는 손길.
ⓒ 전갑남
어느 쪽이든 든든한 어른의 위엄이 느껴지는 이름이다. 수만 년의 세월 동안 가족 같은 오름들을 묵묵히 품어온 저 굽이치는 능선. 그 너른 성품이 이날따라 유난히 듬직한 할아버지의 등줄기처럼 다가왔다.

바람이 눕힌 억새 바다

거의 정상이 가까워졌을 때, 하산하는 젊은 부부를 만났다.

"정상 쪽 바람 어때요?" 아내의 물음에 그들은 "엄청 세요! 그래도 따라비 뷰는 정말 끝내줍니다"라며 활기찬 응원을 건넸다.
 땅의 할아버지를 지키는 작은 파수꾼 같은 초소 곁을 지나며, 멀리 구름에 가려진 한라산과 눈을 맞춘다.
ⓒ 전갑남
 북쪽 정상을 향해 이어지는 억새 사이로 뻗은 능선길. 호젓한 산길이 걷기에 편안했다.
ⓒ 전갑남
드디어 남측 정상! 마지막 계단을 딛고 올라선 순간, 거대한 대지의 박동이 느껴지는 커다란 분화구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3월의 억새는 황금빛도 은빛도 아닌, 세월을 견딘 낡은 한지의 색을 닮아 있었다. 그 바랜 색감들이 겹겹이 쌓인 분화구의 곡선과 만나니 따라비오름은 마치 거대한 수묵화처럼 다가왔다. 뺨을 때리는 바람에 슬쩍 아내의 의중을 물었다.
"여보, 바람이 너무 센데 여기서 그만 하산할까?"
"무슨 소리예요! 분화구 세 개가 다 보이는 곳까지는 가야죠."
 능선을 걷다 만난 뜻밖의 행운. 쏜살같이 달리는 고라니의 역동적인 모습이 순간 아주 작게 담겼다.
ⓒ 전갑남
아내의 단호한 결의에 다시 옷깃을 여미고 북쪽 정상을 향했다. 둘레길은 한 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는 구조였다. 능선을 걷던 중, 정적을 깨고 분화구 아래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누른 셔터 속엔 녀석의 역동적인 모습이 순간 아주 작게 담겼다. 제주 오름이 건네는 뜻밖의 행운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북쪽 정상에 다다랐을 때, 적막을 깨는 초등학생 아이들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인근 지역아동센터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니 우리 고장이 정말 멋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라고 말하는 아이의 순수한 고백 속에 따라비오름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녹아 있었다.

"얘들아, 너희 정말 대견하구나! 자기 고장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직접 발로 걷고 가슴에 담을 줄 아는 너희가 바로 이 오름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네."

우리가 먼저 하산을 시작하자 아이들은 손을 흔들며 "조심히 내려가세요!"라는 예쁜 인사를 잊지 않았다.

중첩된 곡선이 그려내는 위로
 세 개의 분화구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오름의 웅장한 입체감. 새로운 세계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 전갑남
 능선 곳곳에 세워진 크고 작은 돌탑들이 오름의 운치를 더한다.
ⓒ 전갑남
따라비오름만이 갖는 매력은 바로 이 '중첩된 곡선의 조화'에 있다. 보통의 오름이 하나의 단조로운 구멍을 가진 것과 달리, 따라비는 세 개의 분화구가 서로 어깨를 맞대고 웅장하게 얽혀 있다. 능선은 칼날처럼 날카롭지 않고 포근하게 굽이치며, 그 사이사이로 바람이 드나드는 길을 내어준다.

정상에 서면 마치 거대한 파도의 정점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발 아래로는 분화구들이 깊은 입체감을 만들고, 시야 끝에는 한라산과 수많은 오름이 군신(君臣)처럼 늘어서 있다. 이토록 정교하고 풍성한 곡선미는 왜 이곳이 제주 오름의 정수라 불리는지 몸소 증명해 보였다.

내려오는 길, 바람 때문에 헝클어진 아내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웃음이 터졌다. 궂은 날씨라 걱정하며 시작한 길이었지만, 결국 우리는 함께 바람을 이겨냈고 그보다 더 값진 제주의 속살을 공유했다.
 정상 벤치에 앉아 한라산과 수많은 오름을 바라보며 평온한 위로를 얻는 순간이 행복했다.
ⓒ 전갑남
"우리 정말 잘했어! 안 올라왔으면 이 대단한 풍경을 지나치고 말았을 거 아냐."

아내는 방금 본 세 개의 분화구와 억새 바다가 여전히 눈에 선한지, 벅찬 목소리로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그 말 한마디에 산을 오르며 찼던 가쁜 숨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거센 바람 덕분에 억새의 군무를 보았고, 고라니를 만났으며, 고장을 사랑하게 된 아이들의 예쁜 인사까지 들었다. 이번 제주 여행의 오름 여행이 이토록 선명한 곡선과 생동감 넘치는 추억으로 채워져 참 다행이다.

덧붙이는 글 | 3월 3일부터 3월 9일까지 제주를 여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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