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밑으로 뚫린 세 개의 터널, 왜 이렇게 됐냐면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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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산 버스 정류장 도성의 성벽과 남산타워, 차가 다니는 길의 끝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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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산 3호터널 공사(1977) 회현동 쪽의 3호터널 갱 입구, 1977년의 공사 현장 모습이다. |
| ⓒ 서울역사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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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산 성곽 남산 동쪽 방향으로 내려가는 한양도성 성곽. 산자락 숲이 보이는 멀리로, 국립극장과 호텔 등이 보인다. |
| ⓒ 이영천 |
남소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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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소문 터 남소문이 서 있었다는 흔적이 작은 표석으로만 남았다. 옆이 장충단로로 동대문~한남동을 잇는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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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충단로 국립극장 앞에서 본 장충단로. 직각에 가까운 각도로 꺾이는 도로가 많은 질문을 자아낸다. |
| ⓒ 이영천 |
차들은 직각을 돌아 멈춤 없이 지나간다. 그러나 표석 앞에서는 잠시 속도를 늦추게 된다. 길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기억은 길가에 작은 돌을 남겨 두었다. 장충단로는 그 둘이 갈라지는 지점을 지금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억압적 권위와 독재 권력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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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센터 노출된 직선의 기둥과 둥글게 말아 올라간 외장에서, 허울 뿐이던 지난 시대의 권위와 체제 선전을 보는 듯하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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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클럽 고종이 외교와 문화, 사교를 위해 1904년 설립한 클럽. 운영과 회원제에 대해 여러 비판이 오간다. |
| ⓒ 이영천 |
자유센터가 체제 권력의 감춰진 얼굴이라면 서울클럽은 사회 권력의 뒷모습이다. 하나는 크게 말하고 다른 하나는 숨어서 웃는다. 방식은 달라도 두 공간엔 같은 질문만 남았다. 이 공간을 차지한 집들은 과연 무엇을 지키려 했는가. 시민의 자유인지 아니면 권력 그 자체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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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조 흥화문 경희궁에서 뜯겨 와, 오랜 시간 이 자리를 지켰던 '흥화문' 모조품. 흥화문의 수난이 우리가 겪은 근현대 수난의 척도다. |
| ⓒ 이영천 |
해방 후 박문사는 사라졌지만, 문은 그 자리에 남아 영빈관과 호텔 문지기 노릇을 해야만 했다. 복원되지 못한 역사가 용도만 바뀌어 존속했다. 존치된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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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양도성 장충동 동남쪽 경계를 따라 이어지는 한양도성. 성곽 안쪽에 일제는 박문사를 세웠고, 독재권력은 그 자리에 재벌 하여금 호텔을 짓게 하였다. |
| ⓒ 이영천 |
1988~1994년 흥화문이 경희궁으로 돌아갔어도, 그 시간까지 지워낸 건 아니다. 문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모조품과 기억이다. 호텔이 누리는 지금의 격조와 후광은, 의도했건 아니건 치욕스러운 그때 역사에 잇닿아 있다. 화려한 호텔을 지날 때마다 그래서 우린 자꾸 되물어야 한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계승했고 청산하지 못한 건 무엇인가?
장충단과 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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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충단 터 1900년 고종이 갑신정변과 임오군란, 을미사변 때 목숨을 잃은 신하와 군사들의 넋을 기리는 단을 쌓았던 자리다. |
| ⓒ 이영천 |
이후 제단은 공원으로, 제향도 사라지고 비석만 남아 시대를 견뎌냈다. 한적한 장충단공원 풍경 속을 거닐다 보면 한 나라 군주의 후회는 물론 나라가 받은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음을 느낀다. 나무 사이로 스미는 바람에서, 어지러운 질문들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느낌이다.
장충단을 벗어나면 둥그런 지붕을 인 체육관이 나타난다. 1970년대 어린 시절, 시골에 살았던 덕분에 장충체육관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 이름은 또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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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충체육관 한양도성 성벽이 잘려 지워진 끝자락에 장충체육관이 앉아 있다. 1970~80년대 이곳에서 벌어지는 경기를 통해 사람들은 억눌린 열망과 함성을 분출해 냈다. |
| ⓒ 이영천 |
옆 동호로에서 성곽이 끊어진다. 능선 따라 이어진 마을이 장충동 북단이다. 이 구간의 성벽은 대체로 남산에서부터 시작된 장충동의 동남쪽 경계와 일치한다. 장충동은 성안 마을이다.
지리적으로는 이전부터 존재하던 공간이지만 '장충동'이라는 이름과 공간적·상징적 정체성은 1900년 장충단이 생긴 이후에 형성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장충단과 박문사. 힘겹지만 쓰러져 가는 나라의 자존을 세우려 몸부림친 공간에, 일제는 우리 안에 치욕의 시설을 들여앉힌 셈이다. 도성의 수호신이고자 했던 남산이 당한 치욕, 그건 바로 아픈 우리 역사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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