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인류는 위대한 사냥꾼이었을까? 의외의 기록

박홍순 2026. 3. 22.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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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만나는 인문학] 인간과 동물 ① 정복 대상인 소

[박홍순 기자]

 프란시스코 고야 <투우> 1825년
ⓒ 퍼블릭 도메인
인간의 가장 오랜 의문 가운데 하나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빼놓을 수 없다. 정신적 능력이 발달한 존재인 이상, 외부 사물이나 현상 이전에 자신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아무런 매개 없이 무작정 인간 자체의 본질을 찾으려고 하면 뜬구름 잡듯이 막연한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인간과 다른 존재의 비교가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이었다. 문제는 무엇과 비교할 때 인간의 본질적 성격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가이다. 아무래도 산·강·바다·하늘처럼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나는 대상이면 정체성을 찾는 의미가 불분명해진다. 우리와 상당히 근접한 특성을 갖는 대상이 적합하다.

인간이 유기체인 이상 그 안에서 비교 대상을 찾았고, 비슷한 특성을 가진 동물이 제일 적합했다. 생존 방법과 활동 방식이 가장 비슷하니 말이다. 그래서 인간이 동물과 어떤 관계인가를 통해 정체성을 규정하고자 했다. 여기에서는 여러 동물 가운데 구석기부터 인간의 일상생활과 관계가 깊었고, 미술에서도 자주 묘사된 '소'를 매개로 다양한 견해에 다가서겠다.

투우, 동물에 대한 정복의 상징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투우>는 농경민족이 기억하는 소의 인상과 다르다. 유혈이 낭자한 결투 현장이다. 말에 탄 두 명의 투우사가 긴 창으로 공격한다. 한 명의 투우사가 소의 어깨에 창을 꽂고, 다른 투우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경계한다. 소는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은 듯 멈칫하는 자세다.

주위를 보면 호락호락한 상황은 아니다. 투우사가 탄 말도 소의 뿔에 들이받혀 피를 흘리고 있다. 게다가 옆의 말은 이미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다. 말 아래로 땅을 적실만큼 피가 흥건해 숨이 멎지 않았나 싶다. 모자가 나뒹굴고 있어서 투우사도 심한 상처를 입었을 게 분명해 보인다. 뒤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이 말에 탔던 투우사인 듯하다. 경기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청중의 함성이 귀를 울리는 기분이다.

투우는 수렵이 목축으로 대체된 이후에 정형화된 의식으로 변형된 경우다. 위험을 동반하는 사냥 행위에 의식적 절차와 복장·도구 등의 요소를 버무려 흥미를 극대화했다. 격렬한 사냥이 그러하듯이 피와 살이 튀는 장면에 청중의 응원까지 겹치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마치 로마제국 당시 검투사의 사투를 보면서 광기에 휩싸이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고야가 태어나고 활동한 스페인은 투우의 나라로 유명하다. 여행하다가 웬만한 산이 나오면 소를 형상화한 대형 시설물을 흔하게 본다. 고야도 투우 관람을 즐겼던 듯하다. 투우 그림을 여러 점 그렸고 많은 양의 판화도 제작했다. <투우>의 장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기 과정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다.

투우가 시작되면 먼저 그림처럼 겨드랑이에 창을 끼운 투우사가 소의 어깨에 창을 꽂는다. 무지막지한 힘을 빼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리 만무하다. 사납게 돌진하는 소를 피하지 못하면 말과 기수가 저만치 나가떨어진다. 즉시 다른 투우사들이 망토를 흔들어 흥분한 소를 유인하여 쓰러진 이를 구한다. 투우사들은 다시 일격을 노린다. 그림은 바로 이 긴박한 장면을 스냅사진처럼 보여준다.

소의 힘이 빠지면 투우사가 사람 팔 길이의 짧은 창을 등에 꽂는다. 소가 지쳐서 잘 움직이지 않으면 끄트머리에 폭죽이 달린 창을 사용한다. 폭죽이 터지면서 소가 마지막 힘을 짜내 미친 듯이 뛰는 장면이 관중의 흥분을 끌어내 다시 경기장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이때 마지막 투우사가 검을 들고 등장한다. 최후의 일격에 육중한 소가 바닥에 고꾸라지면 경기장은 청중이 외치는 '비바!' 함성으로 요동친다.

원시 사냥 정서가 투우에 스며들다

투우 경기장의 소는 인간의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사냥 대상일 뿐이다. 친근함은 물론이고 일말의 동정도 받지 못한다. 구석기 시대의 사냥과도 상당히 다르다. 사냥은 치명적인 공격으로 빨리 끝나도록 한다. 하지만 투우는 소가 오래 고통받도록 고안된 의식과 절차로 가득하다. 청중의 흥분이 커지고 장시간 유지되기 때문이다.

투우에서 소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은 명백하다. 지배 대상으로서의 동물, 정복자로서의 인간이다. 동물 지배는 자연에 대해 우월한 존재로서의 인간 지위를 드러낸다. 자연에 속한 일부분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자연계의 정점에 서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은 자연계에서 벗어나 이 모두를 관장하는 우월한 존재다.
 라스코 동굴벽화 <들소 사냥> 17,000 BC
ⓒ 퍼블릭 도메인
투우에서 만나는 살기 어린 관계는 농경과 목축 이전으로 올라간다. 구석기 동굴벽화에서 접하는 들소 사냥이 대표적이다. 워낙 큰 몸집에 날카로운 뿔도 있어서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십여 명이 달라붙어서 창을 던지거나 찔러도 사냥 도중에 목숨을 잃는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동굴벽화에도 소뿔에 찔려 목숨을 잃는 장면이 나온다.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에서 발견된 라스코 동굴의 <들소 사냥>은 구석기 벽화를 대표하는 몇 점 중의 하나다. 먼저 위압감을 줄 정도로 거대한 몸집이 눈에 들어온다. 소의 몸에서 가장 취약한 복부를 창으로 공격하는 데 성공했다. 등은 워낙 억센 가죽으로 덮여 있어서 던진 창이 튕겨 나가기에 십상이다. 창에 맞은 부분에서 창자가 튀어나와 있는 모습이 생생하다.

하지만 인간에게 닥친 위험도 상당하다. 들소의 뿔에 받혀 넘어지는 인간이 보인다. 들소의 앞다리 근처에 중간이 끊겨 있는 직선이 보인다. 사냥 도중에 날카로운 뿔을 앞세우고 돌진하는 들소에 충돌해 부러진 나무 창이다. 강력한 뿔과 부러진 창을 대비시킨 점을 고려할 때 인간도 죽거나 최소한 중상을 입었을 듯하다.

벽화를 그린 구석기인은 자신이 겪은 사냥 경험과 목격한 장면을 담았으리라. 구석기인들의 두 시선이 그림에 압축되어 있다. 현실적으로 들소 사냥의 위험에서 오는 두려움이 묻어난다. 동시에 위험을 감수하고 소 사냥에 성공하려는 열망도 강렬하다. 복부 밖으로 터져 나온 내장의 과장된 묘사는 이를 반영한다.

원래 인류는 위대한 사냥꾼이었을까?

스페인 투우는 원시 인류의 정복 열망과 두려움을 경기라는 의식화된 형태로 보존했다. 대신 두려움을 극복하고 정복을 실현한, 승리의 환희를 담는 의식이다. 인류의 오랜 통념의 반영이기도 하다. 호랑이·사자처럼 자연계 최상위 포식자를 제외하고는, 소와 같은 대형 동물을 비롯하여 모든 동물에 관한 한 인류는 처음부터 지배자였다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사냥이 원시 인류의 생존을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활동이었다는 통념은 착각일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과학자이자 작가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제3의 침팬지>에서 주장한 다음 내용은 전혀 다른 현실을 지적한다.

'사냥하는 사람'이라는 신화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수렵이 상당히 중요했다는 신앙을 버리기는 매우 어렵다. (…) 오랜 역사에서 인간은 위대한 수렵인이 아니라, 식물성 음식이나 소형 동물을 얻기 위해 석기를 사용하는 약삭빠른 침팬지였다.

그에 의하면 인류는 지구에서 살아온 기간 대부분에 걸쳐 그리 대단한 사냥꾼이 아니었다. 흔히 초기 인류를 떠올리면 해가 질 때쯤 들소·멧돼지처럼 큰 동물을 긴 막대에 묶어 메고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머리에 그린다. 당연히 저녁 식사 시간에는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잘 익은 고기를 먹었으리라 예상한다.

이러한 통념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허구적인 신화에 불과하다. 초기 인류는 대형 동물 사냥꾼으로서의 능력이 대단하지 않았다. 겨우 석기 시대에서 벗어난 단계의 원시생활을 하는 원주민들의 사례를 보면 분명해진다. 뉴기니 원주민들은 평생 몇 마리의 캥거루만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다른 지역의 원주민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구석기 시대 인류보다 더 나은 사냥 도구의 사용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열량 대부분을 채집으로 획득한 식물성 음식물에 의존한다. 사냥이 성공하는 날이 종종 있기는 하지만, 토끼처럼 작은 동물이어서 우리가 예상하는 '사냥하는 남자'의 영웅담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서구인들의 동물 지배 사고방식은 기독교 성경에 나온 신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다. <창세기>에는 신이 인간을 창조하면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한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라고 한다. 원래 인간이 세상의 모든 동물을 지배하게 되어 있었다는 믿음이다. 신이 만든 질서라는 점에서 자연적 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의 역사적 사실로 보면 맹수는 차치하고 소에 대한 지배조차 인류 역사 전체로 보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대규모 집단을 형성하고, 소의 두꺼운 가죽을 뚫을 수 있는 청동기·철기 화살촉을 사용한, 이른바 문명 시대 이후의 일이라고 봐야 한다. 다시 말해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월한 정복자 지위를 자연적인 성격이나 원리로 볼 근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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