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 한 번으로 사랑에 빠진 '입문용 카메라'의 반전

이재필 2026. 3. 2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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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on EOS Kiss가 기록한 홍대의 낮과 인사동의 밤... 즉시 확인할 수 없는 필름 사진의 묘미

사진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전통시장과 주변의 일상을 기록해왔다.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통해 사라져 가는 풍경과 기억, 기록의 의미를 묻는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기자말>

[이재필 기자]

▲ A7 촬영 EOS KISS는 블랙과 실버 모델이 있다. 전면에서 보면 보급형 DSLR 300D(한국발매명)과 차이가 없다.
ⓒ 이재필
첫차의 아침, 빛을 그리며 서울로 향하다

찰칵, 찌이잉.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3월의 첫 일요일 공기를 가르는 육중한 기계음과 함께 열차의 문이 열린다. 플랫폼에 서서 입김을 한 차례 내뱉자 하얀 안개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나는 습관적으로 가방 끈을 고쳐 매며 첫차에 몸을 실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서울. 7년이라는 긴 세월을 인내하며 세 번째 책을 세상에 내놓는 친구의 출판기념회에 가기 위해서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책 한 권은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다. 그것은 작가의 생(生)에서 떼어낸 한 조각의 살점이며, 밤마다 꾹꾹 눌러 담은 고독의 기록이다. 7년 만에 세 번째 결실을 본 친구의 마음은 어떠할까. 그 치열했던 고뇌의 시간을 곁에서 지켜봐 온 나로서는, 그가 맞이할 찬란한 저녁의 자리에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레는 여정이었다.

열차가 속도를 높이자 창밖으로 겨울 끝자락의 풍경이 길게 늘어지며 스쳐 지나갔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들판과 낮은 지붕 위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내리고 있었다. 매서운 추위가 여전했지만, 그 서늘함 속에는 곧 다가올 봄의 기운이 미세하게 섞여 있었다.
▲ EOS KISS 촬영 첫차의 플랫폼 아직 도시가 완전히 깨어나기 전의 시간. 첫차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찬란한 아침빛 사이로 각자의 하루를 향해 빠르게 흩어졌다.
ⓒ 이재필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플랫폼은 이미 각자의 삶을 향해 질주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차가운 공기 사이로 아침 햇살이 창을 뚫고 번져 나왔다. 사람들은 그 황금빛 먼지 속을 가로질러 계단을 오르고,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맡기며 빠르게 흩어졌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가방 안을 가만히 더듬었다.

오늘의 산책을 위해 준비한 필름 두 롤이 손끝에 닿았다. 일상의 따스한 갈색 톤을 입혀줄 Kodak ColorPlus 200, 그리고 푸른 밤의 도시 불빛을 영화처럼 기록해 줄 Kodak Vision3 500T. 이 두 롤의 필름은 오늘 내가 만날 서울의 낮과 밤을 온전히 책임질 것이다. 그리고 내 손에는 오늘의 주인공, Canon EOS Kiss가 들려 있었다.

필름 시대의 황혼기에 태어난 Canon EOS Kiss

사진가들 사이에서 이 카메라는 종종 묘한 평가를 받는다. 묵직한 금속 바디에서 느껴지는 클래식한 '손맛'이나, 태엽이 감기는 듯한 아날로그적 낭만을 기대하는 이들에게 EOS Kiss는 너무나 매끈하고 현대적이다. 플라스틱 바디의 가벼움과 전자식 인터페이스는 언뜻 보기에 초창기 디지털카메라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다.

실제로 이 카메라는 필름 시대의 황혼기에 태어났다. 훗날 캐논의 보급형 DSLR(디지털 일안리플렉스 카메라) 시장을 평정한 EOS 300D가 바로 이 디자인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으니, 사람들의 오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캐논은 필름의 시대가 저물어갈 무렵, 카메라를 전문가의 전유물에서 대중의 일상적인 도구로 변모시키려 했다.

EOS Kiss는 거창한 예술을 논하기보다는 여행자의 가방 옆 주머니에 슬쩍 꽂혀 있기를, 혹은 아이의 첫 걸음마를 찍기 위해 거실 한구석에 놓여 있기를 바랐던 카메라였다. 투박한 로망은 부족할지 몰라도,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를 가볍고 경쾌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다. 오늘처럼 긴 하루를 걷고 보고 기록해야 하는 서울의 산책자에게 이보다 더 적절한 동반자는 없을 것이다.

오늘 이 가벼운 바디에 짝을 지어준 것은 Canon EF 40mm f/2.8 STM 렌즈다. 이 렌즈는 디지털 시대에 설계된 최신식 렌즈지만, 캐논의 축복이라 불리는 EF 마운트 덕분에 수십 년 전의 필름 바디인 EOS Kiss와도 완벽하게 호환된다. 이 조합의 가장 큰 미덕은 단연 '기동성'이다. 소위 '팬케이크 렌즈'라 불릴 만큼 얇고 가벼운 외형 덕분에 카메라를 목에 걸고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장비의 무게감이 사라지는 마법을 경험하게 된다.

사진기라는 도구가 몸의 일부처럼 느껴질 때, 사진가는 비로소 피사체와 온전히 마주할 수 있다.
40mm라는 화각은 참으로 묘한 경계에 서 있다. 광각의 시원함을 가진 35mm보다는 조금 더 밀도 있고, 표준의 정석이라 불리는 50mm보다는 시야가 조금 더 트여 있다.

이 5mm 혹은 10mm의 미세한 차이가 만들어내는 안정감은 대단하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감. 그것은 타인에게 무례하지 않으면서도 도시의 풍경 속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는 산책자의 시선과 닮아 있다.

조리개 수치 f/2.8 또한 실용적이다. 물론 f/1.4나 f/1.8 같은 밝은 렌즈들이 주는 극적인 배경 흐림(Out of Focus)은 매력적이지만, 거리의 풍경을 담을 때는 오히려 적당한 심도가 필요하다. 빛이 쏟아지는 정오의 대로변에서는 조리개를 조여 선명한 기록을 남기고, 해가 뉘엿뉘엿 지는 골목길이나 조명이 은은한 실내에서는 최대 개방으로 빛을 끌어모으면 그만이다.
▲ EOS KISS촬영 강을 건너며- 차창 밖으로 펼쳐진 한강의 풍경. 서울은 언제나 강을 건너며 시작되고, 또 다른 도시로 이어진다.
ⓒ 이재필
가벼운 카메라가 가져다주는 경쾌함

흔히들 무겁고 기계적인 조작이 복잡한 카메라가 더 깊이 있는 사진을 만들어준다고 믿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한 장을 찍기 위해 노출을 계산하고 초점을 수동으로 맞추는 고통스러운 과정은 분명 사진에 무게감을 더한다.

하지만 가벼운 장비는 그 고통의 시간 대신 '더 많은 장면'을 선사한다. 무거운 카메라였다면 가방 속에 넣어두었을 순간에도, EOS Kiss는 내 손목에 매달려 찰나의 빛을 낚아챌 준비를 하고 있다. 가벼운 카메라가 가져다주는 경쾌한 발걸음. 그것은 도시를 탐험하는 사진가에게 허락된 최고의 사치다.

출판기념회가 열리는 저녁까지는 아직 시간이 넉넉했다. 나는 오랜 단골 미용실이 있는 홍대로 향했다. 격식 있는 자리에 가기 전 매무새를 가다듬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변해버린 홍대의 풍경을 기록하고 싶은 욕심이 더 컸다.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9번 출구.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예상치 못한 낯선 감각이 나를 덮쳤다.

내가 기억하는 홍대는 늘 '불온한 에너지'가 감도는 곳이었다. 해가 지면 골목마다 인디 밴드들의 서툰 악기 소리가 흘러나왔고, 길모퉁이에는 술에 취한 청춘들이 세상을 다 얻은 듯 호기를 부리며 소란을 피우곤 했다. 자유분방한 그래피티가 그려진 담벼락과 낡은 건물들 사이로 예술가들의 가난한 꿈이 유령처럼 떠돌던 동네. 그것이 나의 기억 속에 박제된 홍대의 모습이었다.
▲ EOS KISS 나의 홍대 - 예전의 홍대와는 조금 다른 풍경. 하지만 오전의 햇빛 속에서 이 도시는 여전히 청춘의 색을 가지고 있었다.
ⓒ 이재필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재의 홍대는 몰라보게 정돈되어 있었다. 거리는 깨끗했고, 무질서했던 간판들은 세련된 디자인으로 교체되었다. 전날 밤의 광기를 증명하던 쓰레기더미나, 골목을 점령하며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던 비둘기들도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치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된 사람처럼, 도시는 정돈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성숙'일지도 모르겠다. 거친 에너지가 빠져나간 자리에 자본과 시스템이 들어앉으며 도시는 안전해졌고 쾌적해졌다. 하지만 그만큼의 쓸쓸함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 낯선 감정을 억누르며 뷰파인더에 눈을 갖다 댔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EOS Kiss의 경쾌한 미러 쇼크가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디지털처럼 즉각적인 결과물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필름 한 칸이 감기며 소중한 장면 하나가 물리적으로 저장되었다는 확신이 든다.

변해버린 풍경 속에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햇살을 받으며 환하게 웃는 어린 연인들의 얼굴, 각자의 스타일을 뽐내며 활기차게 걷는 젊은이들 그리고 나처럼 카메라를 들고 무언가를 기록하려 애쓰는 누군가의 뒷모습들.

서울이라는 거대한 유기체는 이처럼 낡은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생명력을 덧칠하며 끊임없이 박동하고 있었다. 정돈된 거리 위로 쏟아지는 오전의 햇살은 공평했다. 나는 그 찬란한 빛 아래에서 홍대의 오늘을 필름 속에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인사동의 환대, 그리고 조계사의 고요한 향

겨울날의 짧은 해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도시의 그림자가 길어질 무렵, 나는 행사가 열리는 인사동으로 걸음을 옮겼다. 인사동은 홍대와는 또 다른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낡은 한옥의 서까래와 현대적인 갤러리가 공존하는 곳. 그곳의 좁은 골목 끝 갤러리 카페에서 친구의 출판기념회가 시작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따뜻한 공기와 함께 정겨운 소음들이 쏟아져 나왔다.
▲ EOS KISS 촬영 책에 남겨지는 시간 - 친구의 세 번째 책이 세상에 나온 날. 한 권의 책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 천천히 쌓여 있다.
ⓒ 이재필
친구는 상기된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7년이라는 세월 동안 포기하지 않고 문장을 다듬어온 이의 얼굴에는, 깊은 안도감과 자부심이 묘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그 긴 시간을 함께 견뎌온 좋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축하의 인사가 오가고, 누군가는 감동적인 축사를 낭독했으며, 누군가는 친구의 등을 두드리며 무언의 응원을 보냈다.

나는 그 소란스럽고도 따뜻한 광경 속에서 카메라를 들었다. EOS Kiss는 작고 조용했다.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미소와 진심 어린 포옹 사이로 나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조용히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는 때로 백 마디 말보다 유능하다. 감정이 고조되는 찰나를 정지된 프레임으로 가둬둠으로써, 훗날 우리가 그날의 온도를 다시 느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행사가 끝난 뒤, 친구와 짧은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왔다. 밤의 인사동은 낮보다 더 깊은 정취를 풍겼다. 차가운 밤공기에 정신이 맑아졌다. 기분 좋은 고양감을 안고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디선가 은은하고 맑은 향내(香臭)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그 향의 발원지를 찾아 걷다 보니 조계사 입구에 닿았다. 부처님 오신 날을 미리 준비하는 것인지, 사찰 경내는 수만 개의 연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밤하늘을 수놓은 형형색색의 등불들이 바람에 일렁이며 환상적인 빛의 바다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낮의 홍대가 청춘의 빛이었다면, 밤의 조계사는 위로의 빛이었다.
▲ EOS KISS촬영 연등 아래의 밤 - 늦은 밤의 사찰은 언제나 조용하다. 누군가의 소망과 누군가의 기도가 빛처럼 매달려 있다.
ⓒ 이재필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대웅전 앞에는 몇몇 사람들이 간절한 모습으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들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 정성스러운 뒷모습만으로도 마음이 숙연해졌다. 나 역시 카메라를 내려놓고 잠시 합장을 했다.

오늘 만난 친구의 앞날이 이 연등처럼 밝기를. 변해가는 도시 속에서도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은 낡지 않기를. 그리고 나의 소소한 일상들이 이 필름 한 롤처럼 의미 있게 채워지기를.

차가운 공기 속에 섞여 드는 향내는 마음의 소란을 잠재웠다. 나는 조계사 경내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그 빛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하루 동안 서울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새벽에서 밤으로 이어졌던 모든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기다림의 미학, 현상소를 향하는 마음

오늘 하루, 내 손과 어깨에는 EOS Kiss가 머물렀다. 수십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나는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디지털카메라였다면 이미 수차례 확인하고 지웠을 사진들이지만, 필름 카메라는 그 모든 순간을 철저하게 암흑 속에 가두어둔다.

친구의 책이 7년이라는 긴 시간을 견디고서야 독자들과 마주했듯이, 내가 오늘 기록한 서울의 풍경들도 인화지와 모니터 위에 나타나기까지는 고유한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현상소의 독한 약품 냄새를 통과하고, 스캐너의 붉은 광선을 마주하고서야 나는 비로소 오늘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에 감동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EOS KISS 촬영 도시의 고요함 - 밤이 깊어질수록 도시는 조금 더 차분해진다. 불빛 아래의 문은 마치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을 기다리는 듯하다.
ⓒ 이재필
어쩌면 초점이 나갔을지도 모른다. 예상보다 어둡게 찍혔을 수도 있고, 손떨림이 그대로 남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오늘의 일부다. 완벽하지 않기에 더 인간적이고, 다시 되돌릴 수 없기에 더 소중한 기록들. 서울역의 눈부신 아침 햇살,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닐던 홍대의 골목길, 친구의 출판기념회에서 피어오르던 환희의 순간, 그리고 조계사의 고요한 연등 빛까지.

이 모든 장면은 지금 내 가방 속 작은 플라스틱 통 안에 잠들어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몸은 고단하지만 마음은 충만하다. 필름 카메라와 함께 걷는다는 것은 결국 '기다림'을 배우는 과정이다. 서두르지 않고,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며, 다가올 미래를 기쁘게 고대하는 법. 오늘 나의 서울은 그렇게 필름 속에서 천천히 익어가고 있었다.

며칠 뒤 현상소에서 전송될 사진 속에서, 나는 오늘의 나를 다시 한번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의 서울은 또 어떤 색감으로 나를 반겨줄까. 찰칵, 찌이잉. 마지막 셔터를 누르며, 나의 서울 산책은 비로소 완성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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