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정치 보복... 어느 독립운동가의 억울한 죽음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반공의 본질을 증명하는 사건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있었다. 반공이 용공으로 매도돼 전직 경찰청 수사국장이 총살형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한국인들을 억압한 반공 이데올로기가 순전히 허구였음을 입증하는 사례다.
북한군이 전면 공격을 개시한 1950년 6월 25일, 전직 미군정청 경무부 수사국장인 최능진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그는 1948년 5·10 총선 때 이승만의 무투표 당선을 막고자 서울 동대문갑구 출마를 시도했다가 극우세력의 훼방으로 후보자 등록에 실패한 독립운동가다.
이 일은 '이승만 저격수'를 저지하고 무투표 당선에 성공한 이승만이 7월 20일의 대통령 선거 승리 뒤에 정치 보복을 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0월 1일에 이승만 정권은 정부전복 혐의를 씌워 그를 체포했다. 이 때문에 항소심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은 그는 상고심 재판을 받던 중에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서울에 진주한 북한군은 서대문형무소를 열어 수감자들을 풀어줬다. 하지만 그에게는 인민군 또한 반갑지 않은 존재였다.
| ▲ 독립운동가 최능진 선생 |
| ⓒ 자료사진 |
최능진이 모셨던 조만식은 소련군 및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했다. 그랬기 때문에 북한군이 옥문을 열어준 일은 그를 애매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이 상황에서 그가 벌인 일이 반전평화운동이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8권 최능진 편은 "최능진은 1950. 7.경 북한군 점령하에 있던 서울에서 민족진영 인사들을 규합하여 '즉각 정전, 평화호소대회'를 추진"했다고 기술한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를 다루는 글에 나타나는 '민족진영'은 세계 노동자의 연대를 추구하는 공산주의에 맞서 한민족 부르주아의 이익을 옹호하는 세력을 듣기 좋게 표현하는 용어다. 1994년 1월 23일 방송된 KBS <다큐멘터리 극장> 최능진 편은 그가 접촉한 '민족진영'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서울에는 인도교 폭파로 서울을 떠나지 못한 정치인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최능진은 이들과 접촉, 민족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즉시 정전, 평화통일운동'이었습니다."
북한군 치하의 최능진은 '민족진영'을 토대로 평화호소대회 개최를 추진하면서, 정전 문제를 국제연합(유엔)에 상정하자고 북한에 제안했다. 이 문제를 모스크바나 베이징이 아닌 뉴욕에 갖고 가자고 북한에 제의했던 것이다.
이 점은 남한 당국이 그를 체포한 뒤에 육군본부 법무감이 작성한 판결심의회 심사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위의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이 심사자료에는 "정전에 관한 안을 국제연합에 호소할 것을 인민군 당국에 제안"한 사실이 기재돼 있다.
최능진이 반전평화운동을 벌인 것은 1950년 7월 초부터 15일 사이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 직후에 북한군 치하에서 정전운동을 벌이는 것은 북을 이롭게 하는 일이 아니었다. 전세가 북한 쪽으로 기울어 '낙동강 전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한국군에 내려진 것은 8월 1일이다. 그래서 7월 초중순은 북한군의 전투 의욕이 상당히 강할 때였다. 이런 시점에 북한군의 전투 의욕을 저감시키는 반전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불과 5년 전에 공산당이 싫다며 월남한 사람이 북한군 치하에서 그런 운동을 벌였다. 대담한 인물이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정전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자'고 제안한 부분도 북한군의 의욕을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틀 뒤인 6월 27일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대북 군사제재 및 유엔군 구성에 관한 제1511호 결의가 나왔다. 북한과 유엔이 적이 돼 있는 상황에서, 정전 문제를 유엔에 갖고 가자고 북에 제의했던 것이다.
대담하게 나오는 그를 상대로 북한은 '이승만 타도 대회'도 함께 열자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평화호소대회는 열리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 그가 북한 정치보위부에 체포됐다가 석방되는 일이 있었다는 증언이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실려 있다.
김일성과 소련군을 피해 월남했던 인물이 북한군 치하에서 정전을 외치고 유엔 상정을 주장한 것은 그의 반공·반북 노선이 고도의 신념에 기반했음을 보여준다. 이승만 타도 대회에 동의하지 않은 부분도 마찬가지다.
| ▲ 경찰청 홈페이지에 있는 최능진 선생에 대한 소개 |
| ⓒ 경찰청 홈페이지 |
정전 문제를 유엔에 맡기는 것은 북한에 불리한 일인데도 군법회의에서는 이것이 비합리적으로 해석됐다. 위 보고서에 따르면, 군법회의는 최능진의 '범죄사실' 일부를 이렇게 확정지었다.
"1950년. 7. 초부터 1950년 7.15.에 이르는 기간에 김일성에게 평화호소대회를 건의하고 김일성의 지시와 서울시 인민위원회의 협조를 받아 사회인사 80여 명을 망라한 위 대회를 개최하여, UN에 '즉각 정전'과 대한민국에 '북한 측과 이에 아부하는 중간파를 망라한 연립정부 수립'을 요청하고자 함으로써 UN군의 실력 행사를 무의미케 하며 대한민국 국권을 전복코자 하였다."
북한군과 유엔군이 교전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정전 문제를 유엔에 맡기는 것은 당연히 유엔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다. 이것이 군법회의 판결문에서는 "유엔군의 실력 행사를 무의미케" 만드는 일로 이상하게 왜곡됐다. 재판부가 양심을 저버린 채 사리에 맞지 않는 법왜곡을 범했던 것이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힘을 별로 쓰지 못했던 이승만은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저격수'인 최능진이 재판에 회부됐기 때문에, 군법회의가 이승만의 의중을 무시한 채 사건을 다루기는 힘들었다. 재판부가 사실관계를 터무니없이 해석한 것은 정권으로부터의 사법 독립이 힘들었던 상황과도 무관치 않다고 볼 수 있다.
최능진이 이적죄로 몰린 것이 북한군 치하의 공개활동 때문이라고만 보기는 힘들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 발발 직후의 혼란을 이용해 항일인사나 진보인사 혹은 수감자들을 대거 학살했다. 최능진이 전쟁 초반에 학살되지 않은 것은 그가 개전 사흘 뒤부터 북한군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군 치하의 공개활동이 없었어도 그는 이승만 정권의 학살 가능성에 노출돼 있었다.
| ▲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공산당 부역자'로 몰려 총살당했던 독립운동가 고 최능진 선생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27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심을 마친 최 선생의 아들 최만립씨가 법원을 나서고 있다. 2015.8.27 |
|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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