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침략전쟁과 병참기지화 그리고 부천지역의 시대상
[박종선 기자]
일제는 1931년 한반도를 넘어 중국을 침략하여 만주국을 세웠으며, 1937년에는 중국 본토를 침략하며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침략 야욕은 중국 본토에 머무르지 않고 동남아까지 이르렀으며 1941년에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일제가 이러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지속적인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적자원으로 대표되는 군인들 뿐만아니라 무기, 식량, 군복 등 군수물품이 많이 필요하다. 천문학적으로 전쟁비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일제는 전쟁비용의 상당량을 우리나라에서 충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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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인일체화의 대도약> 제목의 1939년 10월 3일 매일신보 기사 조선총독부는 침략전쟁을수행하기 위해 서울과 인천 사이의 부천, 김포, 시흥 등에 군수공장과 주택단지를 구성하는 경인일체화 계획을 세웠다. 이는 한반도를 대륙진출을 위한 전진기지로 그리고 군수물품을 생산하는 병참기지화로 활용하는 것으로 부천에서는 1940년 6월 소사리에 일흥사가 세워졌다. |
| ⓒ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
부천군권업발전협의회 개최
장영한은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발맞추어 부천군 관내에 진출한 공장들이 원활하게 지어지고, 중국에 대한 무역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부천군권업 발전협의회를 개최하였다. 1938년 3월 31일부터 4월 2일까지 3일에 걸쳐 군회의실에 개최된 이 회의에 수리조합 대표, 곡물검사소장, 금융조합장, 면기수 등 핵심자들이 참여하였다. 한마디로 일제의 침략전쟁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부천군 행정이 적극 협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것이다. 광산 착암기를 생산하는 일흥사(日興社)는 1930년대 말에 착공되어 1940년 6월 부천군 소사리에 세워졌다.
국민정신총동원부천연맹 결성과 구체적 사업 진행
일제는 침략전쟁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 총력전을 전개한다. 1937년 10월 12일 일본 본토에서 먼저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중앙연맹이 우리나라에서는 1938년에 결성되었다. 1938년 6월 22일 서울 부민관(府民館)에서 발기인대회가 열렸으며, 7월 7일 경성운동장에서 결성식이 열렸다. 부천연맹은 7월 13일 소사신사에서 그리고 소사면연맹 결성식은 8월 17일 소사신사에서 진행되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국민정신총동원 결성이 2달도 안되어 군과 면단위까지 결성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이기고 인적·물적 자원을 원활히 동원하기 위해서는 조선인들의 자발성이 뒷받침 되어야 하므로 내선일체를 통한 황국신민화가 강조되었으며, 국민일치 정신운동이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사업이 바로 신사참배와 근로보국작업대였다.
조선총독부는 중국 침략전쟁이 성공할 시 지역별로 신사에서 이를 축하하는 봉고제를 진행하였다. 장영한은 1938년 5월 서주(徐州)함락, 동년 10월에는 한구(漢口)함락 1942년 2월에는 신가파(싱가포르)함락을 축하하는 전첩봉고제를 소사신사에서 진행하였다. 또한 1938년 9월에는 군직원, 오정 소사 부내 계양 등의 4개 면내 직원,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의 간부 등과 함께 오정면 오곡리에서 근로작업을 진행하였다.
지원병후원회 결성
장영한은 군인을 모집하기 위해 지원병후원회를 결성하였다. 1939년 2월 11일 오후3시 소사면 공회당에서 지원병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회장은 면장을 했던 김동완이 맡았으며, 부회장은 반전농장 지배인인 수등정웅과 정미업게 종사하며 '미곡계의 패황'으로 불렸던 원인상이 맡았다. 이사는 이성환외 30명, 상담역은 각 면장과 소학교장이 맡았으니 부천군내 최대의 민관조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장영한은 인천경찰서장과 함께 각 학교를 돌며 지원병을 모았다. 1939년 1월에는 소사북소학교에서 청년단원 50명을 소집하여 그 자리에서 10명의 지원자를 받기도하였다. 1941년 11월에는 소사읍에서 좌담회를 개최하여 53명의 지원병을 모집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장영한은 부천군수로서 1938년 4월 2일 경성일보에 <축 조선교육령개정 육군특별지원병제실시> 광고하였다.
경방단(警防團) 조직
전쟁이 한반도 밖에서만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었다. 전투기를 이용한 침공이 일본 본토에만 일어나지 않고 한반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첩보에 의해 조선총독부는 경방단을 각 지역에 조직하였다. 소사에서는 1939년 10월 4일 소방조(消防組), 수방단(水防團), 방호단(防護團) 등을 해체하고 이를 하나로 모아 경방단을 조직하였다. 방공 침투에 대비해 이를 조기에 찾아내고 침공 후에는 복구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든 것이다.
부천군유도회(富川郡儒道會) 결성
1930년대가 되면 유림(儒林)의 친일화(親日化)도 과속화된다. 지역의 유학자들이 모여 1939년 12월 15일 소사공회당에서 황도유학을 표방하며 부천군유도회를 결성하였다. 황도유학은 일왕을 위하여 충효(忠孝)를 다한다는 것으로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제국주의에 동조하는 것이다. 장영한은 여기에서 회장을 맡았다.
창씨개명 주도
1940년 2월 장영한(張永翰)은 안동영한(安東永翰)으로 창씨개명한다. 이후 부천군민들이 창씨개명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주도하였으며, 부천군의 중심인 소사면에서는 4월15일 구장, 진흥회장, 도작 간부 등을 모아놓고 창씨개명 취지를 보급하였으며, 면직원은 강제로 창씨개명을 하도록 하였다.
금속류 공출
조선총독부는 대동아전쟁으로 부족해진 군수물품을 만들기 위해 금속류를 공출하게 된다. 1942년 3월 1개월동안 소사읍에서는 각 가정과 관공서 그리고 회사 등에서 금속류를 공출하였는데 그 양이 만여관이 되었다. 이러한 공출한 나중에 보리공출, 목화공출, 송탄유 채취, 피마자 채취 등으로 확대되었다.
일제 35년의 식민지배 동안 우리 선조들은 수많은 핍박과 수탈을 당했으며 수많은 정책이 펼쳐졌다. 초기에는 경제적 수탈에 집중되었지만 1930년대 이후에는 경제적 수탈 뿐만아니라 침략전쟁에 동원되는 가슴 아픈 역사가 펼쳐졌다. 지원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가고 내선일체로 대표되는 민족말살정책이 진행되었으며, 심지어 성과 이름까지 바꾸어야만했다.
이러한 정책들이 일제의 힘으로만 이루어졌을까? 결코 아니다. 일제에 부역한 사람들이 있었다. 부천에서는 그 중심에 군수를 했던 장영한이 있었다. 부천에서 일제의 침략전쟁과 강제동원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제8대 군수 장영한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친일파 장영한이 시민들에게 많이 알려지길 바래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콩나물신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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