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선물" 제시 버클리, 오스카 女주연상 놀랍지 않은 이유 [송원섭의 와칭]

“이 놀라운 어머니 역할을 통해 모성을 탐구할 수 있었던 것, 저 스스로가 엄마가 된 것, 그리고 이 특별한 날(영국 기준의 어머니날)에 ‘어머니들이 세상에서 수행하는 놀라운 역할’에 대해 이런 상을 받게 된 것은 결코 잊지 못할 선물입니다.”
지난 15일(현지시각)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제시 버클리의 소감입니다. 버클리는 ‘햄넷’을 통해 아카데미상뿐만 아니라 골든글로브, 영국 아카데미(BAFTA)와 미국 배우조합상(SAG)까지 영미권 영화의 핵심 4개 시상식에서 모두 여우주연상을 휩쓸었습니다. 사실 저 자신도 ‘햄넷’을 보면서 다른 부문은 몰라도 여우주연상 만큼은 다른 영화에 줄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리 놀랍지는 않았습니다.
햄넷? 햄릿이 아니고 햄넷?
사전지식 없이 ‘햄넷’이란 제목을 한 번에 알아듣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만치 우리는 ‘햄릿’이라는 고유명사에 익숙해져 있죠. 분명히 ‘햄넷’이라고 말해도, 듣는 사람은 발화자가 ‘햄릿’을 잘못 발음한 것이 아닌가 확인합니다. 그리고 사실 이 영화는 ‘햄넷’과 ‘햄릿’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그 아내가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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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비슷한 그림, 잠과 죽음 사이
이 그림은 영국의 라파엘전파 화가 프레더릭 레이턴의 ‘타오르는 6월(Flaming June)’과 매우 흡사합니다. 세상모르고 깊이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이죠. 하지만 여인의 오른쪽 머리 위에 있는 꽃은 협죽도입니다. 강한 독성이 있는 식물이죠. 그 사실을 알고 나면, 과연 이 달콤해 보이는 잠이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잠인가, 아니면 영원한 잠인가 궁금해집니다. 가장 아름답고 평온한, 생명이 충만한 6월의 어느 날에도, 인간의 삶이란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죽음의 흔적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해 주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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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위반으로 8세 연상녀와 결혼한 셰익스피어
여기서 잠시 역사적인 사실 정리.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1564년 영국의 스트랫포드 어폰 에이본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18세 때, 8세 연상인 앤 해서웨이(농담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배우와 이름이 똑같습니다)와 결혼합니다. 식을 올리고 6개월만(!)인 1583년 6월에 맏딸 수잔나가 태어났으니 분명한 속도위반입니다. 그리고 1585년에는 아들 햄넷과 딸 주디스가 쌍둥이로 태어나지만 햄넷은 1596년, 11세 때 전염병으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나서 대략 5년 뒤, 1601년에 셰익스피어는 걸작 ‘햄릿’을 발표합니다.
아일랜드 작가 매기 오퍼렐은 2020년 이 내용을 바탕으로 한 소설 ‘햄넷’을 발표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이죠. 오퍼렐은 알려진 이야기에 상상력을 보태, 아들 햄넷을 잃은 셰익스피어가 걸작 ‘햄릿’을 쓰기까지의 과정을 아내 아그네스(앤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의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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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순간, 그는 어디에 있었나
결혼한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지만, 윌은 가족을 두고 혼자 런던으로 가 연극계에 진출하겠다고 말하는데 아그네스는 이 결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결코 “뭐? 연극? 애도 마누라도 버리고 혼자 런던? 미쳤어? 가긴 어딜 가!” 라는 식의 태도는 아니었죠. 하지만 마을에는 역병이 돌고, 아그네스는 혼자 미친 사람처럼 노력하지만, 끝내 햄넷을 구하지는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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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나만큼 슬퍼했었다'
이 영화의 가치는 아그네스가 윌의 연극, ‘햄릿’을 보러 극장에 가는 순간부터 드러납니다. 영화 ‘햄넷’의 모든 순간, 모든 장면들은 바로 이 극장 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소년 햄넷은 살아 있을 때 아버지를 따라 연극 놀이를 하며, “무대에서 칼싸움하는 멋진 배우”를 꿈꿨죠. 그리고 어머니 아그네스는 윌이 만들어낸 무대를 보며, 아버지 윌이 죽은 아들을 '나만큼' 사랑했고, '나만큼' 애통해 했고, '나만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이해합니다.
이 놀라운 장면은 맥스 리히터의 음악과 클로이자오 감독의 연출을 통해 관객을 압도하는데, 여기서 제시 버클리라는 탁월한 배우의 역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일랜드 출신인 버클리는 영국 왕립연기학교(RADA)를 졸업한 정통 셰익스피어 극 배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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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항상 우리 곁에 머문다
‘햄넷’은 인간의 삶이 아무리 평화롭고 아무리 안정되어 보여도 그것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 본질적으로 취약한(fragile) 것인지를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 취약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철저하게 외면하며 살아갑니다(어쩌면 그래야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언젠가 우리 모두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경험하게 되고, 그 현실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죠.
이 영화는 그래도 우리는 그 순간을 극복하고 다시 살아가야 하고, 그럴 수 있는 힘은 살아남은 사람들끼리의 이해와 연대에서만 나온다는 것을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햄넷’을 본 관객들이 이 진실을 이토록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제시 버클리라는 배우의 힘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송원섭 song.weonseo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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