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연의 K컬처] 살리는 커뮤니케이션Ⅱ: 빚과 감사 - 감사함은 감사함으로

“팃포팃, 팃포탯(tit-for-tit, tit-for-tat)?”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종종 던지는 질문이다. 누군가로부터 선물이나 도움을 받았을 때 그것을 등가의 것으로 갚을지 다른 무엇으로 되돌려 줄지에 대한 물음이다(영미권에서도 흔히 쓰이는 표현은 아니다). 전자를 택하는 학생들이 늘 압도적으로 많다. 이론상 오답이긴 하지만 인간관계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이라 재미있다.
미국 중서부에는 매년 많은 눈이 내린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에 쌓인 눈이야 시에서 제설차량을 동원해 치워주지만, 사람들이 다니는 집 앞 인도는 집주인의 몫이다. 가끔 필자가 늦게 일어나는 날에는 마음씨 좋은 이웃 존이 눈을 치워주기도 한다. 영하 30도에 육박하는 강추위와 물을 머금어 반쯤 얼음이 된 눈의 무게를 생각하면 ‘감사합니다’가 절로 나온다. 눈은 곧 다시 내린다. 이번에는 평상시보다 더 일찍 일어나 존의 집 앞부터 눈을 쓸기 시작한다. 전에 비해 눈이 가볍거나 덜 내렸다 싶으면 그다음에 내리는 눈도 내가 먼저. 감사함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었음에 뿌듯하다. 하지만 존과의 관계는 거기에 머물러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팃포팃’이 가진 태생적 한계다.
처음 마주하는 두 사람 중 하나가 상대방에게 먼저 호의를 베풀 때, 둘 사이 힘의 균형이 잠시 무너진다. 특히 받은 자는 이 힘의 불균형을 조금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마련이며, 호의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고마움도 커지지만 마음은 더 불편해진다. 이 불편함을 해소하는 친사회적 방법은 하나. 자신이 받았던 호의에 상응하는 그 무엇으로 상대방에게 되갚아주는 것이다. 이러한 주고받기(reciprocity)가 반복되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자라고 관계의 접점은 더 넓고 깊어진다. 이것이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는 인간관계의 성장 원리다. 여기서 핵심은 무엇을 주고받느냐인데, 위에서 언급한 필자의 경험은 악수(惡手)의 좋은 예다. 같은 것을 주고받을 때 손익 계산은 투명해진다. 누가 더 줬고 누가 덜 받았는지 셈이 쉬워지고, 궁극적으로 언제 둘의 관계가 균형을 회복했는지, 언제 미안함 없이 관계를 맺음해도 되는지 알 수 있다. 서로 다른 것을 주고받았을 때 셈은 불투명해진다. 내가 더 줬는지 상대가 덜 받았는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애매함에서 오는 작은 부담감이 호혜(互惠)를 반복해야 하는 이유로 작용해 둘의 관계는 더 가까워진다. 필자는 그때 이웃의 눈을 치워줄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과 떡볶이나 불고기를 나눠 먹거나 한국에서 보내온 마스크팩을 선물해야 했다.
어리게만 봤던 조카 녀석이 드디어 장가를 간다. 필자가 미국에서 조교수로 첫 직장을 잡던 해 홀로 유학길에 올랐던 중학생 사내아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우리 가족과 한 지붕 아래에서 힘겨운 타지 생활을 함께 이겨낸 기억 때문인지 건조한 필자지만 정이 넘친다. 결혼식을 지켜보다 울면 어쩌나(예식이 거의 끝날 때 즈음에야 식장에 들어가 스크린에 비친, 여전히 익숙한 조카의 초등학생 시절 사진을 보게 됐는데 얼굴이 뜨거워져 이내 밖으로 나와야 했다). 누이와 매형은 멀쩡할 텐데,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애초부터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가까운 친척은 결혼식을 관람할 수 없다는 평범한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필자의 자리는 축의금 접수 데스크. 쏟아지는 사람들과 그들의 손에 들린, 자신의 이름이 적힌 돈봉투들이 내가 볼 수 있는 전부였다. 식장 밖 로비에 즐비하게 늘어선 화환들도 기억난다. 예식이 끝나자 직원 한 분이 화환에 부착됐던, 누군가의 이름과 소속이 적혀 있는 리본 뭉치를 내게 건네며 그 수를 확인해 주고 바쁘게 걸어간다. 불현듯 오늘 이 결혼식을 찾아온 이들을 하객(賀客)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젊은 부부의 결혼을 축하하고 이 둘의 행복을 빌어주기 위함이 이유이겠지만, 그 이면에는 이제껏 그들의 경조사 때마다 자리를 지켜주고 기꺼이 축·부의금을 전했던 누이와 매형의 일관된 호의에 대한 감사와 은혜를 꼭 되갚겠노라는 굳은 의지가 더 강하게 비쳤다. 하지만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이러한 한국 사회의 관습은 전형적인 ‘팃포팃’에 가깝다. 선의로 처음 베풀었던 호의와 그에 대한 보답이 형태나 금전적 가치상 서로 대충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남긴 이름과 축의금의 액수가 ‘팃포팃’이 적절히 실현됐는지 확인할 수 있는 근거 자료가 돼 준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이렇게 보면, 이들이 이 자리에 모인 주된 이유는 마음의 부채를 털어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하는 이기적 욕구일 수 있다. 손익 계산 후 관계가 다시 균형을 회복했음을 확인하고, 마치 거기서 탈출하려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들이 처음 상대방의 호의를 경험하며 느꼈던 감정은 분명 감사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감사함은 곧 갚아야 할 빚으로 바뀌는 것이 한국 사회의 정서인 듯하다. ‘먹튀’와 배은망덕을 특히 경계하는, 보은(報恩)의 실천 강령에 대한 규범이 유독 타이트한 우리 사회의 공기 때문일까.
한국 문화에서 감사(gratitude)는 거의 항상 부채감(indebtedness)으로 이어져 이 둘을 불가분의 관계로 착각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 둘은 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감사는 타인의 호의를 관계의 의미 속에서 받아들이며, 그 관계를 긍정하고 지속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출발하는 따뜻한 정서다. 그것은 반드시 즉각적이거나 등가의 보상을 요구하지 않으며 말 한마디나 기억, 태도, 이해, 수용, 그리고 관계에 대한 애착 등 다른 형태로도 충분히 더 의미 있게 표현될 수 있다. 감사의 핵심은 상환이 아니라 인정이며, 계산이 아니라 관계의 재확인이자 인연의 확장이다. 반면 부채감은 받았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이 만들어낸 불균형과 그 회복에 주목한다. 이때 우리는 타인의 호의를 따뜻한 연결이 아니라 정리해야 할 채무처럼 받아들이게 되고, 감사함의 감정은 곧 ‘어떻게 갚아야 하나’라는 압박으로 다가온다. 한국 사회에서는 호혜와 예의, 그리고 체면을 둘러싼 조밀한 행동 규범 속에서 감사가 쉽게 의무화된다. 결과적으로 감사는 관계를 이어주는 신호이기보다 관계 유지를 위해 응당 투여돼야 하는 비용이나 부담으로 다가온다.
받은 만큼 그대로 돌려주는 방식은 관계의 균형을 회복하고자 하는 이기적 욕구 충족이나 정의구현이 그 목적일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관계의 발전에는 역효과를 가져오기 십상이다. ‘깔끔함’과 ‘경우 바름’에 몰두하는 동안 관계는 ‘정산’의 대상으로 변질돼 버리기 때문이다. 호의는 기억되기보다 계산되고, 관계는 이어지기보다 정리된다. ‘팃포팃’에 치중한, 너무나 예의 바른 한국 사회의 관행이 오히려 관계의 여지를 축소하는 셈이다. ‘팃포탯’은 관계를 확장한다. 상대방을 더 깊게 이해하려는 노력과 관계에 대한 애착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호의를 단순 복제하는 대신, 당시 상대가 처한 상황을 배려해 다른 형태의 그 무엇으로 돌려줄 때 보답은 상환을 넘어 관계의 질을 격상시키는 전환점이 돼 준다. 즉각적인 균형 회복이 아닌 상대에 대한 공감과 집중, 그리고 관계를 지켜가려는 의지가 앞서야 가능한 일이다.
감사함이라는 놀라운 경험을 가져다준 고마운 이들을 빚 갚음으로 응대해서야 되겠는가. 굳이 등가의 것으로 되갚아주기 위해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감사함과 고마움을, 자신이 누군가의 배려를 받을 만큼 가치 있는 사람임을 온전히 만끽해 보자. 그래야 우리가 경험한 감사의 마음을 빚이 아닌 감사함 그 자체로 되돌려줄 수 있다. 문화적 성숙도는 결국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과 그들 간의 관계에 의해 정해진다. 빚이 아닌 감사를 주고받는 사회적 분위기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다.

광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겸 한국문화데이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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