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호르무즈 청구서에 다카이치 스탠다드 주목...정부, 플랜 B 마련에 고심

일본이 미·일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호르무즈 해협 군함 파견 요구’에 선을 긋고 나서면서 한국은 일견 부담을 덜게 됐다. 정부는 트럼프의 안보 청구서를 대미 투자와 외교적 수사로 우회한 일본식 전략이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될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에 중동 사태에 기여할 ‘플랜 비(B)’ 마련을 놓고 고심하는 분위기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는 19일(현지시각) 워싱턴 미·일 정상회담 직후 브리핑에서 “일본 법률의 테두리 내에서 가능한 조치와 불가능한 조치를 상세히 설명했다”고 밝혔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모두발언을 통해 주일미군 4만 5000명 주둔 사실을 거론하며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압박했지만 이후 다카이치 총리가 비공개 회담에서 ‘평화 헌법’ 등을 근거로 자위대 파견이 어렵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풀이된다. 평화헌법 9조는 전쟁과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하고 국가의 교전권을 부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카오치 총리는 파병 대신 730억 달러(약 109조 원) 규모의 제2호 대미 투자 프로젝트를 발표하면서 안보 압박을 우회했다. 또 “전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 트럼프”, “이란의 핵무기 개발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외교적 수사들로 분위기 과열을 막아 “이란 전쟁이 상황을 어색하게 만들거나 심지어 노골적인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초반의 우려에도 순조롭게 출발했다”(폴리티코)는 평가를 받았다.

정부 내부에선 이번 회담 결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번 회담은 트럼프가 지난 14일 소셜미디어(SNS)에서 한국·일본 등 5개국을 콕 집어 군함 파견을 요구한 이후 당사국 정상과 가진 첫 대면 정상회담이다. 사실상 한국을 향할 압박의 수위를 가늠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다름없단 말이 나왔던 이유다.
이와 관련 외교 소식통은 “다카이치 총리가 헌법적 제약을 근거로 명확한 선을 그었고 미 측도 이를 일단 수용하는 기류인 것으로 보인다”라며 “우리 정부 역시 이런 일본 사례를 참조하면서 호르무즈 상황에 기여 가능한 방안을 다각도로 검토 중이다. 무엇보다 이 이슈가 기존 한·미 정상 간 관세 및 안보 합의물인 조인트 팩트시트 이행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상황을 잘 관리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정부 차원에서 내놓을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아직 없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군사적 기여를 택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일각에선 소말리아 아덴만에서 작전 중인 청해부대 투입이 거론되지만, 해적 퇴치에 특화된 부대 특성상 호르무즈의 고도화된 군사적 위협(기뢰·드론·잠수함 등)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많다.
정부는 일단 영국 주도의 호르무즈 해협 규탄 공동성명에 이름을 올리는 방안을 타진 중이다. 영국·프랑스·일본 등 7개국은 지난 19일(현지시간) 공동성명을 통해 “이란군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으나, 한국은 아직 여기에 합류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시적 조치’를 중시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성명 참여 이상의 구체적 실력 행사를 압박할 여지가 크다는 점은 정부의 셈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익명을 원한 여권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의 심기를 달래면서 중동 에너지 수급 문제에 기여할 ‘플랜 B’ 마련을 고심 중이지만 아직 구체적 방안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며 “한반도 전투 준비 태세를 저해하지 않으면서도 중동사태에 지원할 수 있는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중동까지 나갈 수 있는 상태인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 지 등 경우의 수가 복잡하다. (군함 지원 외에) 다른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게 있는지 더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미·일 회담의 결과가 한국의 안도감으로 직결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장은 “안보 무임승차론을 제기해 온 트럼프의 관점에서 보면 일본보다는 한국에 대한 역할 기대나 책임 요구가 훨씬 클 수 있다”며 “일본이 우회적으로 파병을 거절해 당장의 외교적 부담이 가벼워진 측면은 있지만, 우리로 향할 압박이 해소됐다고 보긴 어렵다”고 분석했다. 한·미 간엔 핵 추진 잠수함, 원자력 협정 개정, 동맹 현대화 등 얽혀있는 안보 어젠다가 더 다층적이기 때문에 일본보다 협의가 수월하지 않을 수 있단 뜻이다.
일각에선 미국을 설득할 방어 논리도 일본에 비해 빈약하다는 말도 나온다. 일본은 헌법이라는 구조적 한계를 방패로 앞세웠지만, 한국은 파병의 요건이 ‘국회 동의’이기 때문이다. 야당인 국민의힘 내부에서 파병 찬성론이 분출하고 있는 데다 절대다수 의석을 여당이 차지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의 파병 주저를 정치적 의지 문제로 몰아세울 수 있단 것이다.
이와 관련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정부는 국제 해상교통로의 안전과 항행의 자유가 모든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며, 국제법의 보호 대상이라는 점에 기반해 글로벌 해상물류망이 조속히 정상화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입장”이라며 “이에 따라 국내법 및 절차와 한반도 대비 태세 등을 고려하면서 대처 방안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지원 기자 yoon.jiw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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