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산책]패딩 안 공기, 화면 위 등압선…김춘미가 붙든 '겨울의 기압'
쓰기와 그리기 사이를 오가는 선(線)
한글의 기호성과 풍경의 기척…더 큰 화면으로 밀어 올린 회화
등압선은 원래 날씨의 선이다. 김춘미의 화면에 오면 그 선은 하늘의 압력을 재는 기호에서 조금 비켜난다. 몸 가까이에 오래 머물던 공기의 결, 겨울 저녁의 기운, 막 읽히려다 만 한글의 획처럼 남는다. 19일 서울 종로구 창성동 리안갤러리에서 개막한 개인전 'Isobars in Down'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상태를 얇은 표면 위로 가까스로 끌어올린 그림들이다. 작가 스스로도 이번 전시를 주제부터 세워놓고 시작한 결과라고 보지 않는다. 작업을 밀고 가는 중간쯤에서야 "이번에는 이쪽을 더 얘기할 수 있겠다"는 방향이 조금씩 떠올랐고, 그 흐름이 한 전시 안에 모였다는 쪽에 가깝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 검은 패딩에서 나왔다는 대목은 그래서 이상할 만큼 정확하다. 김춘미는 이번 겨울 작업실에서 패딩을 거의 한 몸처럼 입고 지냈고, 그 시기 유난히 대기, 공기, 기압 같은 비가시적 상태를 오래 생각했다고 했다. 등압선은 어떤 상태를 형태로 만들어주는 선이고, 다운은 공기를 붙잡아 몸을 감싼다.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공기를 다루는 두 구조라는 데서 제목이 나왔다. 다만 그 제목은 전시의 주제를 해설하는 문장이 아니라 감상을 위한 '키'에 가깝다. 작가가 말한 대로, 관객이 화면 앞에서 조금 더 자유롭게 연상해볼 수 있도록 쥐여주는 작은 단서다.
김춘미의 회화가 흥미로운 것은 그 단서가 곧바로 설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화면에는 풀잎 같은 형상이 있고, 물가의 경계 같은 번짐이 있고, 급히 적었다 지운 문자 같은 선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명확한 풍경도, 온전한 추상도 아니다. 작가는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자연물과 장소를 많이 읽어내지만, 자신에게 그것은 먼저 정해진 재현이라기보다 흔적의 축적에 가깝다고 말한다. 지나간 시간, 감각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들, 여러 제스처가 겹겹이 쌓인 끝에 장소 비슷한 것이 뒤늦게 떠오른다는 뜻이다. 예전 작업에서 '바닷가 주변의 주차장' 같은 제목이 자연스레 튀어나왔다는 말도 그 연장선에 있다. 먼저 장면이 있고 그림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밀어붙인 끝에 장면이 나중에 따라 나온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또렷해진 변화는 문자와 기호를 대하는 태도다. 김춘미는 이전에도 캘리그래피 같은 형상, 쓰기와 닮은 제스처를 화면 안에 오래 끌어왔지만, 이번에는 문자 자체를 조금 더 직접적으로 써보고 싶었다고 했다. 한국 관객은 그것을 읽을 수 있고, 외국 관객은 추상적 기호로 받아들인다는 간극 역시 흥미로웠다고 했다. 이 말은 곧 그의 회화가 서 있는 자리를 드러낸다. 읽히는 기호와 읽히지 않는 형상 사이, 뜻이 생기기 직전과 뜻이 흩어진 직후의 회색지대. 그는 "그려야지 하고 있는데 쓸 때가 있고, 써야지 하는데 그릴 때가 있다"고 했다. 몇 겹의 레이어가 먼저 깔리고, 그 위에서 형상과 제스처가 튀어나오며 그리기와 쓰기의 비율이 달라진다. 그래서 관객도 화면 앞에서 잠깐 멈춘다. 저것은 쓴 것인가, 그린 것인가. 이번 전시의 긴장은 바로 그 짧은 머뭇거림에서 나온다.
표면의 인상도 이전보다 더 가볍다. 작가는 이번 작업에서 "좀 더 가벼워지려고 했던 것 같다"고 했고, 동시에 더 투명성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했다. 흰색을 직접 쓰지 않으면서도 레이어와 과정이 조금씩 비쳐 보이는 그림, 관객이 결과만이 아니라 그 안의 시간을 추적할 수 있는 그림을 만들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작품들에서는 캔버스의 흰 기운이 쉽게 죽지 않고, 색은 눌러앉기보다 스미고, 흔적은 덮이기보다 남겨진다. 그는 더 투명하고 더 워터리한 물성을 이번 전시에서 밀고 가고 싶었다고 했다. 어떤 화면은 드립이 흘러도 괜찮고, 어떤 것은 절대 흘러서는 안 된다. 그 경계의 판단은 논리로 환원되기보다 몸에 밴 경험에서 나온다. 모호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확실한 결정. 회화가 여전히 손의 예술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 전시를 가장 잘 설명하는 작품으로 김춘미가 꼽은 것은 1층의 'Key in Landscape'와 그 옆의 'The Drive'다. 작가는 그 두 점에 이번 전시의 심정이 많이 드러나 있다고 봤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번 전시가 이전보다 조금 더 구상적으로 마무리된 것 같다고 말한 대목이다. 풀 같고 나무 같은 형상들이 예전보다 더 직접적으로 드러났고, 이상하게도 한국에서 전시할 때 유독 그런 형상들이 더 나온다고 했다. 왜 그런지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어쩌면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하고 싶은 마음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김춘미의 회화는 단순한 추상 실험이라기보다, 어디까지 드러내고 어디서 다시 물러설 것인가를 시험하는 언어처럼 읽힌다.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또 다른 변화는 크기다. 그는 늘 큰 작업에 대한 의심이 있었다고 했다. 미디엄 사이즈가 주는 정확성과 밀도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더 큰 화면에서 작업을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공간과 조건이 허락하면서 그 시도를 밀어볼 수 있었다. 큰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내가 그림 속에 있고 싶다"는 감각을 말했다. 그림이 나보다 커서, 내가 정말 그 안에 들어가 있다는 느낌. 지우고, 다시 칠하고, 덮고, 또 올린 레이어들이 작가에게는 시간이라면, 관객에게는 천천히 열리는 감각의 층이다. 몇 초 안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나가버리는 시대라고 그는 말했지만, 정작 그의 그림은 그 몇 초를 지나서야 본색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직관적으로 시원하고, 조금 더 들여다보면 다른 결이 열린다.

작년에 낸 아티스트북 'Dice'와 이번 전시가 멀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Dice'는 캔버스 천 위에 드로잉한 작업에서 출발했다. 김춘미는 늘 드로잉 하듯 자유롭고 직관적으로 페인팅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캔버스의 물성과 크기 앞에서 그 마음가짐은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회화와 씨름하게 된다고도 했다. 그래서 그 책은 드로잉과 페인팅의 경계, 그것이 재료의 차이인지 인식의 차이인지를 묻는 실험이 됐다. 작은 드로잉을 크게 프린트해 캔버스의 질감이 드러나게 하면, 그것은 드로잉인가 회화인가. 이번 전시 역시 같은 질문의 연장선에 있다. 마음가짐만큼은 여전히 '드로잉 하듯이' 가고 싶다는 것. 더 자유롭고, 더 직관적이고, 더 거침없이 가고 싶지만, 결국 회화와 부딪히며 생기는 저항을 품은 채 나아가는 것. 이번 화면의 장력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결국 김춘미가 그리고 싶은 것은 명확히 이름 붙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그림을 그리는 와중에 "내가 모르는 세계랑 탁 만나는 감정"이 있다고 했다. 내가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화면 위에 쏟아지는 것들 속에는 낯선 것이 있고, 그 낯선 것 때문에 계속 그림을 그리게 된다는 고백이었다. 그래서 그는 장면을 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그 장면이 생경했으면 좋겠고 처음 만나는 것이었으면 좋겠고, 동시에 익숙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낯설고도 익숙한 것, 읽히는 듯하다가 끝내 다 읽히지 않는 것, 공기처럼 잡히지 않지만 분명 몸에는 먼저 닿는 것. 'Isobars in Down'은 그런 상태를 오래 붙들어 둔 전시다. 겨울은 이미 지나가고 있는데, 그의 화면에는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전시는 4월 30일까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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