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령포가 담아낸 단종의 고독, '왕사남'에 아쉬운 한 가지
[전갑남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즘 장안의 화제는 단연 <왕과 사는 남자>이다. 시골 마을에서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이면 영화 속 주인공 엄흥도를 꺼내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1384만 명(3월 18일 기준)의 관객을 동원한 이 화제작을 보러 아내와 함께 인근의 작은 영화관을 찾았다. 상영관은 크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밀도 높은 공간 덕분에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몰입하게 되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력이 더해진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극적 긴장감과 함께 시종일관 흥미진진했다.
|
|
| ▲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
| ⓒ 쇼박스 |
실제 <실록> 속 단종은 백성을 위해 기우제를 올리며 지성을 다하던 어진 임금이었다. 세종이 생전에 집현전 학사들에게 손자를 잘 보살펴 달라 간곡히 당부하셨을 만큼 그는 영특함이 남달랐다. 용모가 엄숙하고 온화했다는 기록처럼, 그는 결코 유약하기만 한 군주가 아니었다. 그런 총명했던 어린 임금이 자기 뜻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스러졌기에 그 슬픔은 더욱 깊게 다가온다.
진정한 몰입은 고립무원의 땅, 섬 아닌 섬 청령포에서 시작된다.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폐위되어 적막한 유배지에 갇힌 소년 왕의 모습은 처절하리만큼 외롭다. 그 지독한 고독 속에 나타난 촌장 엄흥도는 목숨을 건 따뜻한 배려로 어린 왕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준다.
흥미로웠던 점은 한명회의 묘사였다. 기존 미디어가 투영했던 '약골 지략가'의 틀을 깨고 거구로 등장한 한명회는 어린 단종이 마주해야 했던 서슬 퍼런 권력의 실체를 물리적인 압도감으로 치환해 보여준다. 소년 왕의 고립감을 부각하려는 영리한 연출로 보였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 온 인물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어, 극의 흐름에서 다소 생경하게 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아내와 나눈 서사적 아쉬움이 있다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목이 <왕과 사는 남자>인 만큼, 단종의 반려자인 정순왕후와의 사연이 조금 더 담겼더라면 어땠을까 싶었다.
꽃다운 나이에 영도교에서 눈물로 헤어져 평생을 그리워했던 두 사람의 비극은 그 자체로 거대한 드라마다. 열여덟 어린 나이에 홀로 된 정순왕후는 서슬 퍼런 권력의 감시와 고단한 삶의 풍파 속에서도 여든둘 천수를 다할 때까지 오직 한 사람만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매일 아침 단종이 유배된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기구한 운명을 달래야 했던 그 지독한 그리움은 역사가 남긴 아픈 사연 중 하나다.
만약 주인공 엄흥도가 중간에서 두 사람의 소식을 전하거나 위로하는 역할을 했더라면 극의 정서적 울림은 훨씬 배가되었을 것이다. 역사가 외면했던 그 인간적인 진심이 엄흥도의 충심과 어우러졌다면 하는 미련이 남는다.
엄흥도의 용기와 유해진의 눈빛
영화의 주제는 단종의 최후 순간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 비극적인 장면에서 옆자리의 아내는 결국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모두가 침묵하고 외면할 때, 엄흥도는 목숨을 걸고 시신을 거두는 용기를 냈다. 이는 기록되지 않은 진실을 지키려는 오늘날의 시민 정신과도 그 궤를 같이한다.
특히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장면에서 유해진이 보여준 섬세한 연기는 압권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한 나라의 충신으로서의 비통함과, 자식 같은 아이를 잃은 아비의 애끊는 심정이 한꺼번에 서려 있었다. 그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슬픔과 책임감은 권력보다 소중한 인간에 대한 예우가 무엇인지를 웅변한다.
영화관을 빠져나오는 길, 차가운 밤공기가 오히려 상쾌하게 느껴질 만큼 가슴 한구석이 뜨거웠다. 함께 나온 아내와 영화의 여운을 곱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권력이라는 것이 참으로 비정하다지만, 그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의 도리가 있다는 게 참으로 귀하네."
"그러게 말이야. 피도 눈물도 없는 역사의 기록 뒤에 저런 숨은 진심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오늘을 사는 것 아니겠어."
단순한 역사 영화가 아니라, 어린 왕의 인간적 고뇌와 그 고통을 기꺼이 함께 짊어진 한 남자의 헌신을 통해 '인간과 역사'의 드라마를 깊이 체험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비극적인 역사 앞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인간애,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한 진정한 주제가 아니었을까?
|
|
| ▲ 영화 <왕과사는 남자>의 공식 포서터. 엄흥도(유해진 분)와 어린 임금 단종(박지훈 분)이 나란히 서 있다. 단종의 유배지인 '섬 아닌 섬' 청령포의 지형적 고립감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암시한다. |
| ⓒ 영화 <왕사남> 포스터, (주)쇼박스 |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분별 잃은 미국,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분노 아닌 계산이다
- "다음 선거 때 뽑겠다"는 말에 '유일한 30대' 서울시장 후보의 답변
- 국뽕 판타지 벗어난 BTS, 3억 명 앞에 "대놓고 K 내세웠다"
- "교사를 대선에 악용"...'국힘 임명장' 발송, 전직 교총 간부들 유죄
- 유재석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배우 유연석의 진짜 무기
- "이용만 당해" 노동계 한탄에, 이 대통령의 주문
- 특검, 김현태 구속 재판 요구... "유튜브 나가 여론 왜곡"
- 논산시, 시위자 '사찰' 논란... 카페 출입·동행인까지 기록
- [오마이포토2026] 국회의장, 개헌추진 위해 6개 정당 원내대표 회동
- [오마이포토2026] 진보개혁 5당·시민사회단체 "지체 없이 정치개혁 단행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