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포괄안보의 시대, 전차와 미사일만으론 부족하다
[유도진 기자]
옛말에 사람이 곧 성벽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높은 성을 쌓아도 그 안의 삶이 무너지면 소용없다는 뜻인데, 요즘 국제 정세를 보면 이 격언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강대국의 군사 행동이 타국의 주권 경계를 거칠게 흔드는 현실 앞에서, 우리가 알던 안보의 경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실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 벌어지는 위기는 단순히 전선의 확대라기보다 시민의 일상이 전쟁의 직접적인 사정권에 들어온 구조적 변화에 가깝다.
최근 국제 정세는 군사력과 자국 이익을 앞세운 대응이 다시 힘을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베네수엘라 군사 개입과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은 그런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이와 여성이 죽어나가는 가운데 국제법이나 주권이라는 최소한의 울타리는 힘의 논리 앞에 위태로운 처지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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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년 3월 11일, 아랍에미리트(UAE) 라스알카이마 북부에서 바라본 호르무즈 해협 인근 페르시아만 해상을 항해하는 유조선들. |
| ⓒ 연합뉴스 |
에너지 자원 대부분을 해외에 의존하는 우리에게 중동문제는 결코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국제 정세의 급변이 공급망 마비로 이어지고 시민의 기초적인 생활권이 위협받는 순간, 공동체를 지탱하는 일상의 기반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에너지는 이제 경제 지표를 넘어 국가를 지탱하는 가장 기초적인 토대다. 이 토대가 흔들리면 안보도 오래 버티기 어렵다.
사이버 공간의 위협은 더욱 교묘하다. 갈등의 현장에는 어김없이 선정적인 화면과 출처 불명의 메시지들이 사실인 양 유포된다. 이는 단순한 프로파간다를 넘어 공동체의 판단력을 마비시키는 '인지전' 양상을 띈다.
적 세력의 전산망을 침해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를 갉아먹고 공동체를 진영 논리로 나눠버리는 일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사회적 합의 구조가 무너질 때, 국가안보는 외부의 공격 없이도 내부에서 허물어질 수 있다. 문제는 사회가 정보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얼마나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결국 안보가 닿아야 할 곳은 평범한 시민들의 하루다. 우리가 전쟁을 막아야 할 궁극적인 이유는 국가의 명운 같은게 아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존엄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당장 마실 물과 상처를 돌볼 최소한의 의료품조차 구하지 못해 절규하는 사람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다.
주거와 의료, 돌봄 같은 인간 생존의 최소한의 조건들이 흔들리는 순간, 안보라는 말은 공허하게 들리기 쉽다. 국가가 지켜야 할 대상이 영토라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그 안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이어야 한다는 점을, 전쟁은 가장 잔인하게 드러낸다.
한반도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강력한 군사적 억제력은 포기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다. 힘의 논리가 횡행하는 국제 사회에서 물리적인 힘의 우위를 점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기본이다. 그럼에도 전차와 전투기, 미사일 수에만 매몰되어 안보가 완성됐다고 믿는 것은 분명한 환상이다.
에너지, 사이버 공간, 의료, 물류 등이 촘촘하게 엮인 초연결 시대에 안보의 시야는 훨씬 넓어져야 한다. 포괄안보는 군사력을 경시하는 수사가 아니다. 재래식 무기체계만으로는 결코 사수할 수 없는 삶의 사각지대까지 국가가 실제로 작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강력한 군사적 억제력으로 국경을 방어하고 위협을 억제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만으로 오늘의 사회 전체를 지탱할 수는 없다. 에너지 공급과 물류망, 사이버 공간과 정보환경에 대한 신뢰, 의료와 돌봄, 시민의 평온한 일상까지 함께 버텨야 국가도 버틴다.
결국 국가의 힘은 보유 전력의 크기만으로 가늠되지 않는다. 위기의 순간 시민의 삶 가장 낮은 자리까지 손이 닿는가, 무너지는 일상을 끝내 받아낼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안보를 다시 말해야 한다면, 출발점도 그곳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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