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 잃은 미국,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분노 아닌 계산이다 [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임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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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사기 방지 태스크포스 관련 행정명령에 서명한 뒤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
| ⓒ AP 연합뉴스 |
지금 미국은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다. 최강의 힘을 쥔 나라가 분별을 잃을 때, 역설적으로 동맹은 불안해지고, 그 나라가 경계하려 했던 쪽에는 오히려 기회의 여지가 열린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결과를 낳고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는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유와 판단의 능력에 관한 문제다.
문제는 이미 드러나 있다. 미국이 무엇을 하려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다. 반복되는 결과는 우연이 아니라 하나의 방식이며, 지금의 국제질서는 그 방식 위에서 흔들리고 있다.
가장 가까운 곳이 먼저 무너진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결과는 이미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선택은 유럽을 점점 더 불안정한 위치로 밀어 넣고 있다. 중동 전쟁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개입을 강화할수록, 그 충격은 유럽의 에너지와 물류 구조에 직접적인 부담으로 전가된다.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과 홍해 항로의 불안정은 유럽 산업과 물가에 즉각적인 압박으로 작용하지만, 그 위험을 통제하는 권한과 그 비용을 감당하는 주체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 비대칭은 점점 더 분명해진다. 미국은 개입의 범위를 결정하지만, 그 결과로 발생하는 경제적·안보적 비용은 유럽이 떠안는다. 홍해 사태에서 유럽이 독자적으로 항로 방어에 나선 것은 선택이라기보다 구조적 강제에 가깝다. 개입은 미국이 만들고, 그 후속 부담은 유럽이 감당하는 방식이 고착되고 있다.
에너지 영역에서는 그 효과가 더 직접적이다. 중동 긴장이 고조될수록 유가와 운송 비용은 상승하고, 그 충격은 미국보다 유럽 경제에 더 크게 작용한다. 동일한 사건이지만, 부담의 분배는 균등하지 않다. 그 결과 유럽은 외부에서 보장되던 안정 대신, 스스로 불확실성을 관리해야 하는 위치로 이동하고 있다.
이렇게 동맹의 성격이 바뀐다. 보호의 구조는 점점 약해지고, 비용의 구조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미국의 개입은 질서를 강화하기보다 새로운 불확실성을 만들어내고, 그 불확실성은 가장 가까운 동맹부터 흔들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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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일(현지시간) 이스라엘 중부 해안 도시 네타냐 상공에서 이란의 미사일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 |
| ⓒ AFP 연합뉴스 |
그 효과가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러시아다. 유가 상승은 곧 러시아의 재정 여력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최근 중동 긴장 속에서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러시아의 에너지 세수는 단기간에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같은 충격이지만, 유럽에는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 러시아에는 현금 흐름으로 바뀌는 구조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쟁의 무게가 중동으로 이동할수록 우크라이나 전선은 상대적으로 뒤로 밀린다. 지원과 관심이 분산되는 사이, 러시아는 압박이 완화된 상태에서 시간을 번다. 전쟁은 길어지고, 그 시간은 러시아에 유리하게 작동한다.
제재의 문제에서도 같은 현상이 반복된다. 중동발 공급 불안을 완화하기 위한 미국의 조정은, 의도와 무관하게 대러 압박에 균열을 만든다. 실제로 제한적 유예나 집행 완화만으로도 러시아는 추가적인 수익과 판매 여지를 확보한다. 에너지 시장이 흔들릴수록, 러시아는 '제재 대상'이면서 동시에 '필수 공급자'라는 이중적 위치를 활용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중동의 불안정이 유럽에는 비용으로, 러시아에는 수익과 시간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구조라면, 기준은 하나다. 힘이 어디에 쓰였는지가 아니라, 그 힘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가다.
돈이 아니라 공간을 얻는 중국
러시아가 직접적인 이익을 얻는다면, 중국은 보이지 않는 이익을 축적한다. 그것은 수익이 아니라 위치다. 러시아가 돈과 시간을 벌었다면, 중국은 공간을 얻는다.
미국의 작동이 유럽을 흔들고 러시아에 여유를 제공하는 동안, 그 사이에는 비어 있는 공간이 생긴다. 동맹 내부의 신뢰가 약해지고, 통상과 안보에서 균열이 생길수록, 그 공간은 점점 넓어진다.
이 변화는 외교적 분위기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미국은 중동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인도·태평양에서 운용하던 군사 자산을 중동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전력이 한쪽으로 쏠리는 순간, 다른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공백이 생긴다.
그 공백은 그대로 남아 있지 않는다. 미국의 존재가 얇아지는 만큼, 중국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넓어진다. 인도·태평양에서의 억지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질수록, 중국은 더 많은 선택지를 갖게 된다.
여기에 유럽과 미국 사이의 균열까지 더해진다. 미국의 일방적 조치와 그로 인한 불일치는, 다른 국가들에는 협상의 여지로 바뀐다. 중국은 그 틈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위치를 점진적으로 확보해 나간다.
이 이익은 러시아와 다르다. 러시아가 에너지와 전쟁 환경에서 직접적인 이익을 얻는다면, 중국은 질서의 변화 속에서 위치를 넓힌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아니라, 축적되는 조건이다. 이는 향후 미·중 세력 구도의 변화를 좌우할 미국의 치명적 악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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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비치에 해상 석유·가스 시추 플랫폼 ‘에스더’가 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비상 권한을 행사해 석유·가스 기업 세이블 오프쇼어에 캘리포니아 연안 해상 석유 생산을 재개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이란과의 전쟁으로 유가가 상승함에 따라 국내 공급을 늘리기 위한 조치다. |
| ⓒ AFP 연합뉴스 |
가장 먼저 다뤄야 할 것은 에너지다. 중동의 불안은 곧바로 유가와 운송 비용을 통해 한국 경제에 전이된다. 이 연결고리를 끊을 수는 없지만, 약화시킬 수는 있다. 수입선의 다변화, 비축의 확대, 원전과 전력 구조의 안정화는 단순한 정책 선택이 아니라 생존조건에 가깝다. 외부 충격이 곧 내부 위기로 번지는 구조를 그대로 두는 한, 한국은 언제나 비용을 떠안는 쪽에 머무르게 된다.
해상 교통 역시 마찬가지다. 호르무즈와 홍해에서 벌어지는 긴장은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라, 한국의 수출과 산업을 직접 흔드는 변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한국 자신의 물류와 에너지 흐름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개입의 범위와 방식은 동맹이 아니라 생존선이라는 기준 위에서 재설정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유럽은 또 다른 기회로 나타난다. 미국의 선택이 유럽을 불안정하게 만들수록, 유럽은 대체 가능한 파트너를 찾게 된다. 에너지, 방산, 인프라, 제조에서 신뢰할 수 있는 공급자를 확보하려는 수요가 커질수록, 한국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도 함께 넓어진다. 이것은 호의가 아니라 구조에서 생겨나는 수요다.
인도·태평양에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미국이 중동에 더 깊이 묶일수록, 이 지역에서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얇아질 수밖에 없다. 이때 한국이 해야 할 일은 공백을 대신 메우는 것이 아니라, 그 공백 속에서 자신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기술, 산업, 군사적 역량을 결절점으로 만들어야만, 한국은 단순한 참여자가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위치로 올라설 수 있다.
같은 구조 속에서도 어떤 나라는 비용을 떠안고, 어떤 나라는 그 틈을 가져간다. 차이는 의도가 아니라 판단이다. 문제는 그 결과가 반복되고 있음에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럴 때 후발주자의 선택은 분명해진다. 혼선을 위기로 받아들이면 비용을 떠안게 되고, 구조로 읽으면 기회를 얻는다. 위기의 시대는 도덕의 시험장이 아니라, 무엇보다 실력의 시험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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