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가 새로운 세계 무역질서를 이끌 수 있을까”-피터슨연구소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미국은 지난해부터 세계 각국에 일방적으로 관세를 부과해 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해 온 세계화와 자유무역 질서를 훼손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미국 홀로 자유무역 질서에서 이탈하려는 상황이고, 다른 나라들은 무역 보복을 하거나 서로 관세를 부과하지는 않는 등 큰 틀에서는 여전히 자유무역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세계화와 자유무역 질서에서 이탈한 미국을 대신해 그 수호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는 현재로선 유럽연합(EU)이 유일하다. 일본은 경제규모에서 크게 못 미치고, 중국은 그동안의 국가보조금과 기술탈취 등 때문에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렵다.
미국의 국제경제 분야 싱크탱크인 피터슨연구소(PIIE)의 세실리아 말름스트룀 선임연구원은 지난 17일(현지시간) 홈페이지에 올린 ‘EU가 새로운 세계 무역질서를 이끌 수 있을까(Can the EU lead a new world order in trade?)’라는 제목의 글에서 “EU가 이제 미국 행정부와의 갈등 격화를 피하는 동시에 새로운 동맹 구축에 나서고 있다”며 “이러한 전략 전환이 성공하려면 EU 스스로도 경제적으로 더 강해져야 하며, 동시에 새롭게 강조하는 산업정책이 경제 파트너를 차별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다음은 주요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백악관에 누가 들어서든 유럽은 경제 성장과 혁신, 경쟁력 회복에 나서야 한다. 미국과 중국, 양쪽 모두와의 무역 갈등은 핵심 산업에서 자급 역량을 높여야 할 필요성을 더욱 앞당겼다. EU 집행위원회는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를 지낸 마리오 드라기와 이탈리아 총리를 지낸 엔리코 레타의 두 보고서 권고에 따라 규칙과 규제를 단순화하는 방안을 내놓고 있다. 최근 공개된 산업가속화법(Industrial Accelerator Act)은 산업정책이 일종의 ‘메이드 위드 유럽(Made with Europe)’ 우산 아래 무역 파트너와의 협력을 촉진할 수 있을지, 그리고 보호주의의 함정을 피할 수 있을지를 가를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예를 들어 이 법안은 공공조달과 공적 지원 제도에 저탄소 요건을 도입한다. 핵심은 유럽 내 제조업 생산 확대와 ‘유럽산’ 요건 강화에 있지만, EU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들, 그리고 세계무역기구(WTO) 정부조달협정(GPA) 가입국들은 일정 조건 아래 조달 입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입찰에 들어가는 가치사슬의 모든 부품을 심사하고 추적하는 복잡한 규정이 포함돼 있어, 이는 보호주의적 조치로 간주될 소지가 있다.
그럼에도 이번 산업정책안은 초기 유출 초안보다 보호주의 색채가 옅다. 초기 초안은 비유럽 기업이 EU 기업과 같은 조건으로 참여할 수 있는지에 의문을 낳았다. 완전한 상호주의, 즉 상대국에서도 유럽 기업 입찰에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원칙은 유럽 시장의 공공조달에서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다만 이는 중국의 불공정 경쟁을 막으면서 동시에 녹색 전환을 촉진하려는 목표를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이제 유럽의회와 회원국들은 최종 조항에 합의해야 하며, 그 결과에 따라 전략적 수단으로 설계된 이 법안이 행정적·보호주의적 장벽만 더 높이는 결과로 끝날지 여부가 판가름날 것이다.
미국 의존 리스크를 줄인다는 것은 새로운 동맹을 만들고 EU의 시장 접근 기회를 넓히는 일도 뜻한다. 현재 EU와 교역 상대국 간 체결된 무역협정은 40개를 넘는다. 그리고 추가 협정들도 계속 추진되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대형 경제권과의 새 무역협정이 잇따라 체결되며 더 긴밀한 경제 협력은 물론 폭넓은 파트너십의 길도 열리고 있다. 인도네시아와의 협정은 지난해 9월 정치적으로 타결됐고, 올해 1월에는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 4개국, 즉 아르헨티나·브라질·파라과이·우루과이와의 협정에 서명했다.
메르코수르 협정은 수십 년 동안 논의돼 온 사안이었으며, 특히 농가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프랑스 등 일부 국가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결됐다. EU 집행위원회는 메르코수르 4개국이 자국 내 비준 절차를 마치는 것을 전제로, 이 협정을 5월 1일부터 잠정 발효시키기로 결정했다.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이미 비준을 마쳤다. 유럽의회가 농업 부문의 적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 협정을 유럽사법재판소(ECJ)에 회부한 상황이지만, 법적으로는 이러한 잠정 발효가 가능하다.
인도와의 협정도 마찬가지다. 20년 가까이 논의돼 온 이 협정은 올해 1월 말 최종 타결됐다. 메르코수르 협정과 마찬가지로 지정학적 고려가 양측 협상가들로 하여금 마지막 결단을 내리게 했다. 이 협정에는 특히 농업 부문을 중심으로 여러 예외 조항이 담겼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의 예상보다 훨씬 야심 찬 내용이며, 인도에 대한 EU 수출품 가운데 90%가 넘는 품목의 관세가 철폐되거나 인하된다. 이 합의는 인도가 경제를 더 개방하고 글로벌 무역 무대에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EU는 이와 함께 호주,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과의 협정 체결도 추진 중이다. 멕시코와의 개정 협정은 한동안 표류해 왔지만 5월 말 서명식이 예정돼 있다. 영국과는 기존 협정을 재검토해 위생·식물검역 분야의 일부 비관세 장벽을 완화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며, 스위스와도 무역 촉진을 위한 합의가 막 이뤄졌다.
이들 협정은 참여 국가들이 법적이고 투명한 문서로 규정된, 예측 가능하고 규칙에 기반한 조건 아래 무역과 협력을 원한다는 강력한 지정학적 신호를 보낸다.
이 모든 협정의 너머에는 EU와 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협정인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12개국 간의 유망한 접근이 자리하고 있다. 태평양 지역에서 EU의 동맹국 대부분이 이 협정에 참여하고 있다. CPTPP는 원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회귀’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된 구상이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기 집권기에 미국의 참여를 무산시켰고, 이후 다른 국가들이 그대로 협정을 추진해 2018년 12월 CPTPP가 발효됐다. 이후 영국도 CPTPP에 가입했다.
EU는 CPTPP 회원국 거의 전부와 양자 무역협정을 체결했거나 현재 협상 중이다.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EU 무역담당 집행위원 마로시 셰프초비치는 CPTPP 12개국과 장관급 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무역·투자 대화를 출범시키고 WTO 개혁을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이 밖에도 EU와 CPTPP 회원국 간 디지털 무역 촉진, 공급망 회복력 강화, 비관세 장벽 해소, 통관·규제 절차 간소화 등이 주요 목표로 제시됐다. CPTPP 회원국인 캐나다의 마크 카니 총리는 다보스포럼에서 널리 인용된 연설 이후, EU와 이른바 중견국들과의 연대 강화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EU와 CPTPP 12개국은 카니 총리가 구상하는 일종의 ‘반(反)트럼프 동맹’, 즉 무역과 투자 분야에서의 폭넓은 ‘의지의 연합(coalition of the willing)’의 핵심 축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EU와 CPTPP는 원산지 규정이나 기후 관련 상품·서비스 무역 촉진 규범을 조율할 수 있다. 또 CPTPP 회원국마다 다른 형태의 탄소가격제에 대해 공통 해법을 찾거나 상호 인정 방안을 모색할 수도 있다. 보조금 규정의 현대화 역시 또 하나의 협력 분야가 될 수 있다. 여기에 메르코수르 국가들, 한국 등 다른 뜻이 맞는 파트너들도 참여하도록 할 수 있다.
EU와 그 경제 파트너들 앞에는 새롭고 업데이트된 다자주의의 길로 세계를 이끌 기회의 창이 열려 있다. 이상적으로는 이들이 보조금과 경제안보에 관한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서로 다른 탄소가격제 모델 사이에서 조율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WTO 체제 안이든 복수국 간 협정이든 희토류와 핵심 원자재 분야 협력도 심화할 수 있다. 이런 양자·지역 무역협정은 각국이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리스크를 줄이며, 가치사슬의 회복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새로운 규범을 이끄는 경로가 될 수 있다.
다만 유럽이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남으려면 계속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 새로운 유럽 산업정책은 제조업 경쟁력을 높이고, 녹색 전환을 가속하며, 외국인 투자를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행정 요건과 공공조달에서의 엄격한 상호주의 요구는 이 목표를 약화시킬 수 있다. 유럽은 무역과 투자를 더 어렵게 만들어 파트너와 동맹국을 소외시키는 실수를 피해야 한다. 산업가속화법이 이런 문제를 해소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경제 동맹을 이끌겠다는 유럽의 목표도 흔들릴 수 있다.
정재형 경제정책 스페셜리스트 jj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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