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출국 시도, 합의서 요구까지...고흥에서 무슨 일 벌어지고 있나

고기복 2026. 3. 19.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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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노동자 제도, 무엇이 문제인가] 공무원보다 한 발 빠른 브로커... 2차 피해 입는 계절노동자들

'계절노동자 제도'는 한국 농어번기의 고질적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단기 외국인 고용 제도입니다. 하지만 실제 운영 과정에서 브로커의 불법 개입과 부당이득 행위가 기승을 부리고, 계절노동자들이 인권침해와 임금체불 등으로 고통받는 등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계절노동자 제도, 무엇이 문제인가>기획은 계절노동자 제도의 문제점을 열 편에 걸쳐 심도 있게 다루면서,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합니다. <기자말>

[고기복 기자]

 합의서 서명을 요구하는 브로커의 모습
ⓒ 오마이뉴스
인신매매 피해에서 사람을 구하는 일은, 무엇보다 먼저 피해자를 가해자로부터 '떼어놓는 조치'부터 시작해야 한다. 분리조치는 인신매매 구제 조치의 첫 단계다. 이는 행정 절차이기 이전에, 피해자가 인간으로서 다시 숨 쉴 수 있게 만드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런데 계절노동자 인신매매 피해자가 발생한 고흥군은 피해자들을 가해자와 분리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브로커측은 전방위적으로 피해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브로커 A는 지난해 11월 입국한 필리핀 라구나(Laguna)주 나깔란(Nagcarlan)시에서 온 계절노동자들에게 새벽 3시부터 하루 12시간 이상 굴까기 작업을 시키고도 첫 달 월급을 20만 원대로 지급하고, 15명이 사는 좁은 집에서 한 사람당 월 31만 원씩을 받았다. 이같은 사실이 드러나자, 지난 3월 9일 새벽 A는 전세버스 2대를 빌려서 자신이 관리하던 38명을 강제 출국시키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는 시민단체와 법무부의 제지로 실패로 돌아갔다.

브로커가 38명을 강제 출국시키려고 했던 당일에, 고흥군에선 브로커와 노동자들을 분리 조치했다고 보도자료를 냈다.

하지만 당시 고흥군에는 별도의 숙소가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이었고, 지금까지도 노동자들이 머무는 숙소는 모두 고용주들과 브로커들이 관리하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고흥군 측은 "법무부에서 정보를 받아서 분리 조치를 했다"라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계절노동자 착취 보도 그 후... 여전히 변한 게 없다

"본 합의 이전의 근로조건, 임금 지급 및 근무와 관련된 사항에 대하여 추가적인 분쟁, 민원 또는 신고를 제기하지 않을 것에 동의합니다."

계절노동자 전원을 조기 귀국시키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A는 피해자들에게 위의 내용이 담겨 있는 합의서를 쓰도록 압박했다. 또한 피해자들을 보호해야 할 본국 지자체의 고용센터장은 오히려 브로커를 두둔하며, 피해자들을 당혹하게 했다.

"A를 믿고 그가 무사하기를 기도해 달라."
 계절노동자 단체 채팅방에서 본국 지자체의 고용센터장은 브로커를 옹호했다.
ⓒ 익명 제보
그렇게 브로커가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자, 피해자들 가운데 한 명씩 한 명씩 귀국하겠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인신매매 피해자 구제 조치의 첫 단계인 분리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인신매매 피해자 구제와 보호의 핵심은 피해자가 자기가 당한 일에 두려움 없이 "예"라고 답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조사자들이 가해자의 영향권 안에 있다고 믿는 한, 피해자는 자기 언어로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괜찮다"라고 말하는 입술은 떨리고, "문제없다"고 말하면서도 고개를 떨군다. 이때 분리 조치는 조사기법이 아니라, 침묵을 깨는 인권 장치가 된다.

하지만 고흥군 계절노동자들은 고흥군은 물론 자국 대사관 관계자들에게까지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다른 브로커 B는 매월 5일, 계절노동자들이 급여를 받는 날이면 고흥군 도화면 지역에 위치한 여자 숙소를 찾아왔다. 공제액은 일한 시간에 따라 들쭉날쭉했다.

"사장님은 일한 만큼 돈을 다 준다고 했어요. 그런데 매일 10시간을 일하면 2시간은 B 몫이에요."
"저는 하루 11시간을 일했는데, 하루에 8만 원만 받았어요. 나머지는 B가 가져갔어요"

이런 상황이 알려지자, 그제야 고흥군은 "B에게 연락해서 (그런 행동을) 못 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고흥군은 이전부터 브로커들의 연락처를 알고 있었고,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예방 조치를 취하거나, 조금 더 나은 사후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강제 출국 위기에 몰렸던 계절노동자들은 그룹 채팅방을 만들어 자구책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 주한필리핀대사관 해외이주동자사무실 대표로부터 연락이 왔다.

"몇 명이 모일 수 있나요? 12일 오전 9시 30분이면 좋겠습니다. 모임 장소를 확보할 수 있나요?"

대사관 측이 고흥군 계절노동자들 형편을 살피고, 도움 부분이 있는지를 청취하기 위해 온다고 하자, 계절노동자들은 모임 여부를 두고 한바탕 격론을 벌였다. 고용주나 브로커가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는데, 섣불리 나섰다가 미움 받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만나보자는 의견이 조금 우세했다. 자신들을 파견한 자치단체에서 브로커에게 불리한 증언이 나올까 봐 브로커를 옹호하는 상황에서 대사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은 까닭이었다. 계절노동자들은 면담을 갖기로 결정하자, 주위 동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쉽지 않았다. 채팅방은 반대하는 사람은 나가고, 새롭게 들어오는 사람으로 밤새 인원 변동이 심했다. 그렇게 서로를 격려하며 34명이 한 자리에 모였지만, 대사관은 약속 당일에 다른 일정이 있다며 나타나지 않았다.

계절노동자들이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다고 하자, 대사관 측은 줌 미팅을 시도했다. 계절노동자들은 중도 귀국 의사가 있는 사람과 사업장 변경 의사가 있는 사람이 있는지를 법무부에서 조사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줌 미팅을 마쳤다.

"다음 주에 피해자들을 만나러 가겠다."

대사관 측은 다음 일정을 약속했다. 하지만 피해 계절노동자들은 대사관의 태도를 믿기도 어려웠다. 이들 입장에선 대사관의 줌 미팅은 본국에 보고하기 위한 요식행위처럼 느껴졌다.

이후 브로커는 노골적으로 합의서 작성을 요구하며 피해자들의 입을 막기 위한 회유 작업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사업장 변경을 요구하던 계절노동자들 중에 현재 절반 이상이 입장을 바꿔 귀국을 희망하고 있다. 그들은 한국에서 피해 조사가 제대로 이뤄질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다.

펜을 내려놓고 목소리를 내기로 한 계절노동자들

3월이라 해도 고흥의 바닷바람은 칼날 같았다.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자 에이프릴(가명)은 어깨를 움츠렸다. A는 고흥 지역에서 활동하는 브로커들과 함께 그들 앞에 섰다. 몇몇 노동자들이 합의서를 쓰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펜을 들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바닷바람에 섞여 사라졌다.

에이프릴은 합의서를 찬찬히 읽었다.

"다음 기관 또는 단체에 대하여 동일한 사안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에 동의합니다."
▲ 합의서 내용 중 일부 추가적인 분쟁, 민원 또는 신고를 제기하지 않을 것에 동의한다고 하고 있다.
ⓒ 익명제보
합의서에 언급된 다른 기관 또는 단체는 '대한민국 고용노동부, 출입국·외국인관서, 고흥군청, 필리핀 해외고용청, 기타 정부기관 또는 관련 단체'였다.

'추가적인 분쟁, 민원 또는 신고'... 브로커들은 자신들이 일으킨 문제를 외부에 알리지 않길 원했다.

숙박비 공제도 줄이고 일당도 올려줄 테니 합의서를 쓰라는 A. 계절노동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서명할지 말지를 머뭇거렸다. 이미 많은 것을 잃었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이들은 서명하지 않았을 때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다. 몇몇이 질문을 했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듯 펜을 들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에이프릴은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몇 명 역시 펜을 내려놓고 함께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이제 싸움은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계절노동자 브로커'는 운영 지침 위배한 것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는 피해자들의 결연한 각오와 달리 행정은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브로커는 늘 사건 조사를 하는 공무원들보다 한 발 빨랐고, 공무원들은 늘 뒷북이었다. 민간단체를 통해 문제 제기가 들어오면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피해자들은 여전히 가해자의 울타리 안에서 침묵을 강요당해야 했다.

바다 건너에서도 협박이 이어졌다. 나깔란 공무원들이 에이프릴의 친척들을 통해 전언을 보내왔다.

"합의하지 않으면 피해 배상을 요구하겠다. 너희 때문에 마을의 앞길이 막혔다."

혈육의 입을 빌려서 도착한 말은 위로가 아니라 협박이었다. 고향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라 돌아가도 환영받지 못할 땅이 되어가고 있었다. 에이프릴과 그 동료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침묵은 강요되었으나, 그들은 거부하기로 했다. 고흥의 3월 바람은 여전히 찼으나, 그들은 바람을 마주 보며 서 있었다.
 브로커 A가 나깔란시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하는 임명장. 주한필리핀대사관 해외이주노동자부사무실은 해당 문서가 위법하다고 밝혔다.
ⓒ 제보
한편 브로커 A는 필리핀 나깔란시로부터 코디네이터로 임명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깔란시가 발행한 임명장에 따르면, A는 계절노동자 선발·교육·임금 관리·권익 보호 등 제도 운영 전반을 주요 임무로 두고 있다.

하지만 이는 현시점에서 출입국관리법 및 법무부 외국인 계절근로자 프로그램 운영지침 위배 사항이다. 출입국 관리법(2026년 1월 23일 개정)은 계절근로자 선발·알선·채용에 사인 또는 단체의 개입을 금하고 있고, 근로기준법은 직접 지급과 중간착취를 금하고 있다. 국내 계절노동자 임금 관리 등을 주요 임무로 명시한 필리핀 지자체가 발행한 임명장은 한국 내에서 법적 효력이 없으며, 오히려 브로커 개입을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A가 제시한 임명장에 대해 필리핀 주한필리핀대사관 MWO(해외이주노동자사무실) 로즈 곤드라 대표는 "채용 및 선발은 나깔란 지방 정부가 담당해야 한다"라며 해당 문서는 효력이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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