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판사 “추천 형량: 징역 5년”… 인간 판사의 선택은

‘인공지능(AI) 판사는 징역 10년이라는데 고작 5년? 정권에 굴복한 인간 판사 탄핵!’
‘5만 피해자 피눈물 외면하는 AI 판사, 알고리즘 조작 규명 특검 출범하라!’
2036년 3월 19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 두 개의 현수막이 나란히 걸렸다. 지난달부터 ‘AI 판결 공개법’이 시행되면서 법원 판결과 동시에 AI 판결을 공개하는 것이 의무화됐다. 사법부를 향한 불신이 심화하면서 ‘AI 판사’ 도입 목소리가 커졌지만, 헌법 개정이 필요한 만큼 실제 도입에 이르진 못했다. 대신 정부·여당은 판사들에게 보조적으로만 제공되던 AI 판결을 외부에 공개하도록 했다. 사람들은 이 판결 보조 소프트웨어를 ‘AI 판사’라고 불렀다.
첫 공개 대상은 여당 유력 정치인의 뇌물 혐의 사건이었다. 기업인에게 30억원을 받았다는 해당 정치인에게 AI 판사는 징역 10년을, 법원은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반면 폰지 사기로 5만명에게 5000억원에 달하는 피해를 입힌 AI 트레이딩 업체 대표에게 AI 판사는 징역 5년, 법원은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정치적 고려가 없는 정확한 판결’, 혹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판결’. AI 판사를 향한 평가는 엇갈렸다. 엇갈린 평가의 칼끝은 다시 인간 판사를 향했다. 1개월여 사이 법관을 향한 법왜곡죄 고발은 배 이상 증가했다.
사망사고를 낸 자율주행 차주 강현철(45)의 결심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원에 온 그의 변호인 김혜은(36) 변호사는 현수막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영상재판이 일반화하면서 김 변호사가 직접 법원에 온 것도 거의 1년 만이었다.

김혜은 변호사의 하루
김 변호사는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는다. 10년 전 한 전관 변호사 사무실에서 어쏘(신입) 변호사로 일을 시작했던 그는 3년 후 ‘더 이상 어쏘가 필요하지 않다’는 통보 이후 개업했다. 컴퓨터를 켜자 AI 비서 ‘나판사’가 밤사이 상담한 의뢰인 30명의 사건 내용을 보고했다. 김 변호사는 나판사가 작성한 서면에 ‘도장’만 찍으면 됐다. 건당 수임료는 10만~50만원. 수임료가 낮아지면서 법률 서비스를 이용하는 일은 온라인에서 장 보는 것만큼 쉬워졌다.
김 변호사는 ‘도장 업무’를 모두 처리한 뒤 강현철의 사건 파일을 열었다.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자율주행 관련 ‘트롤리 딜레마’가 현실화한 첫 사건이기 때문이다. 강현철은 자율주행 모드로 운전하던 중 갑자기 뛰어들어 무단횡단을 하는 7세 어린이 5명을 맞닥뜨렸다. 하지만 방향을 틀면 보도 위에 있던 노인 1명이 사망하게 되는 상황. 차량의 알고리즘은 ‘다수이자 더 어린아이들을 구한다’는 자체적인 원칙에 따라 방향을 틀었고 차량에 치인 노인은 사망했다. 검찰은 자율주행차 제조사와 함께 강현철을 재판에 넘겼다.
나판사는 ‘실형 확률 92.7%, 예상 형량 징역 5년’이라는 문구를 띄웠다. 김 변호사는 승소 가능성이 이렇게 낮은 사건을 맡아본 적 없었다. AI가 승패 확률을 계산해주기 시작한 뒤로 패소 가능성이 큰 사건을 맡는 것은 부담이 됐다. AI도 못 찾는 허점을 찾아 승패를 뒤집는 일, 인간 변호사의 일은 한편으론 훨씬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이 사건을 맡았다. 혼란에 빠진 강현철의 눈을 마주했을 때, 그는 이 눈에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김 변호사는 사건을 공론화하고 전체 재판 생중계를 신청했다. 1년여간 법정 안팎에서는 차량 제조사의 영업비밀인 알고리즘을 공개하라는 요구가 분출했다. 자율주행차를 전면적으로 허용한 기존 정책을 뒤엎고 규제를 다시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실제 이를 규제하는 법 개정안도 발의됐다. 이제 법원의 판단만이 남아있었다.

강현철의 결심공판
서울중앙지법 417호 형사대법정, 강현철의 교통사고처리특례법(자율주행 치사) 등 혐의 사건의 결심공판이 열렸다. 온라인으로 생중계가 되는데도 법정은 취재진과 방청객으로 가득했다. 1년에 한두 번,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피고인 최후변론에 앞서 검사의 구형이 진행됐다. 검사는 매섭게 피고인을 몰아붙였다.
“피고인은 사고 당시 차량에 탑승 중이었고 충분히 자신이 핸들을 쥐고 주도권을 잡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피고인은 당황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주도권을 AI에게 넘겼고 이는 생명을 앗아가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피고인은 AI가 효율성과 경제성을 우선한 선택을 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최소한 치사에 대한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봄이 타당합니다. 피고인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해주십시오.”
구형이 끝난 뒤 재판장인 정선우(48) 부장판사의 안내에 따라 김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서 최후변론을 시작했다.
“피고인이 핸들을 잡을 기회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떤 선택도 누군가를 크게 다치게 하거나 사망하게 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특히 그 대상이 어린아이와 노인인 상황에서 5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 결단을 내린다는 것이 가능한가요? 피고인은 전방을 주시하지 않는 등 태만히 운전하지도, 일부러 누군가를 다치게 하려고 핸들을 꺾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진심으로 가슴 아프게 여기며 유가족에게 수차례 사과했습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그 운전석에 있었을 수 있습니다. 기술의 과도기에서 발생한 시스템적 오류의 책임을 피고인이 모두 짊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주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최후진술. 김 변호사 옆에서 수의를 입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던 강현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변호사는 강현철의 떨리는 팔을 잡았다. 태블릿을 들고 최후변론을 읽는 통상의 피고인들과 다르게 강현철은 자필로 쓴 종이를 집어 들었다. 여러 번 쓰고 고친 듯 수정 자국이 많이 남은 진술문이었다.
“구치소에 있는 1년 동안 매일 그 순간으로 돌아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핸들을 잡았더라면, 아니 애초에 자율주행차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하지만 저는 답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제 망설임이 소중한 생명을 앗아갔다는 사실은 돌이킬 수 없고 유가족분들의 슬픔을 제가 다 헤아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재판장님께서 어떤 처벌을 내리든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재판장님, 그리고 이 재판을 보고 계신 모든 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기계 앞에서 무력했던 한 사람의 존재를 살펴봐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정 부장판사 앞에 놓인 모니터에는 AI 판사가 실시간으로 피고인의 표정과 진술 내용 등을 분석한 내용이 떴다.
‘기존의 진술 및 그동안의 주장과 모순 없음’
‘허위 가능성: 0.3%’ ‘감정: 슬픔, 참회, 두려움, 절망 등’
동시에 이런 내용도 적혔다.
‘추천 형량: 징역 5년’
피고인이 반성하고 있는 점, 초범인 점 등의 양형 요소를 고려해 일부 감형했지만 사고 결과와 내용을 고려할 때 실형이 불가피하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20년 차 법관인 정 부장판사는 모니터를 보지 않은 채 강현철의 울고 있는 눈, 떨리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답은 모니터가 아닌 그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징역 5년’이라는 AI 판사의 판결은 정 부장판사의 판결과 함께 공개될 터였다. AI 판결의 공개가 의무화된 후 판사들은 오히려 판결을 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게 됐다. 법원 내부망에는 ‘이게 다 불신을 초래한 우리의 탓’이라는 자성의 글과, ‘어떤 결론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분풀이하기 위한 것’이라는 자괴감의 글이 동시에 올라왔다. 정 부장판사도 몇 차례 판결을 쓰며 AI 판사와 다른 판단이 나올 때마다 양가적인 감정이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최후변론이 끝난 후, 정 부장판사는 그제야 모니터를 봤다. 그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법이 추구하고자 하는 정의를 알고리즘 안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어떤 알고리즘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면? AI의 잘못된 선택을 AI가 판단하는 것은 정당한가? AI 선택의 책임을 누구에게 묻는 것이 정의로운가?’
법정은 고요했다. 그 침묵 속에서 법정에 있는 방청객, 그리고 영상으로 재판을 지켜보고 있는 모두에게 정 부장판사의 고민과 같은 질문이 던져졌다. 김 변호사는 그 질문에 작은 기대를 걸었다. 여전히 판단은 인간의 몫이었다.
“4월 24일 오후 2시, 이 법정에서 선고하겠습니다.”
부장판사 출신 오기두(64) 변호사는 “사람들이 AI 판사 도입을 주장할 때 인간 판사에게 제기하는 비판은 공정하고 독립적인 판결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기계 같은 판결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알고리즘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불리한 판단을 받았을 때는 인간을 향했던 의심이 AI에도 그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서윤(가명·28) 변호사는 “판결에 대한 불만이 사람을 향하면 ‘편향됐다’고 비판할 수 있는데 ‘알고리즘이 잘못됐다’는 것은 납득 자체가 안 되는 불신”이라며 “사회적 혼란이 더 커질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헌법과 당위의 측면에서 AI 판사를 도입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있다. AI 판사의 전면 도입은 ‘법관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와 ‘법관의 독립성’을 규정한 헌법에 위배된다. 윤태성(가명·47) 부장검사는 “AI 판사 도입은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을 결단하자는 것”이라며 “AI가 인간의 최종적 분쟁 해결기관인 법관의 판단을 대체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에는 국가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차진아(52)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법 시스템의 전제는 인간의 존엄이고, 이를 떠받치는 기둥은 자유”라며 “AI 판사는 ‘인간 스스로 판단하고 결단한다’는 의미의 자유를 침해해 궁극적으로 인간 존엄에 반하기 때문에 도입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다만 정치적 양극화가 계속되고 사법 신뢰가 도전받는 상황이 이어지면 AI 판사 도입 필요성이 계속 제기될 거란 관측이 나온다.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낸 김현(70) 변호사는 “법관 판단이 자의적이라는 비판이 계속되면 AI 판결 초안을 공개하라는 목소리가 제기될 수 있다”며 “AI를 계기로 법관을 비판·견제하는 상황은 법원이 반성하고 혁신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민준(가명·46) 부장판사는 “AI가 분석한 양형과 실제 판결이 다르면 비판이 나오기 시작할 것이고 법원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신뢰가 무너지는 건 한순간일 것”이라고 말했다.
AI가 보조적 영역에서 업무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선 대부분이 공감했다. 법조인들이 상상하는 미래의 법정에는 실시간 증언 신빙성 판단, 주요 쟁점 요약·정리, 판결문 초안 작성 등 다양한 형태의 AI가 도입됐다. 1심이나 소액 사건 등에 부분적으로 AI 판사가 도입되는 모습을 예측한 법조인도 있었다.
서면 작성에 집중돼있는 신입 변호사의 역할은 사라지고 업무나 소득의 양극화가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윤다솜(33) 변호사는 “건당 수임료가 낮아지면서 전체적인 변호사의 임금은 하향 평준화가 될 것”이라면서도 “일부 대형로펌은 AI 툴을 잘 활용해 전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들을 수행하게 되면서 더 높은 수임료를 받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고지능 AI의 도래로 법조인의 권위가 도전받는 상황이 생길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임원균(37) 변호사는 “AI가 법리나 판례에 대해선 더 해박할 테니 사람의 역할은 사회적 가치 판단에 무게를 두는 방향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분쟁의 최종 판단 자격을 가진 판사에게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판사를 선발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법조인들은 판단과 책임의 영역에선 여전히 인간의 역할이 필요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박재혁(가명·35) 검사는 “법조인들이 AI에 민감한 개인정보나 회사의 비밀정보를 입력하는 것 자체가 법률 위반에 해당할 여지가 있다”며 “AI에게 책임을 지울 수 없기 때문에 그 역할이 대체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AI 시대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법조인의 치열한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나현주(가명·44) 부장판사는 “AI가 다른 결론을 내더라도 내 판단을 설득시킬 수 있을 만큼 치열한 고민을 해야 한다”며 “판사들이 권위를 지키고 싶다면 스스로 더 열심히 노력하고 기계가 따라올 수 없는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테크이슈팀=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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