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액질 없는 달팽이가 주는 감동

신혜솔 2026. 3. 1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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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마쿠로바의 <달팽이 헨리>를 읽고

5살 손자에게 그림책을 읽어줍니다. 그림책 속에서 나의 동심을 발견하기도 하고 삶의 지혜를 얻기도 합니다. <기자말>

[신혜솔 기자]

손자와 그림책을 읽을 때면 나는 아이의 눈을 자주 보게 된다. 어느 장면에서 오래 머무는지, 어떤 그림 앞에서 가만히 웃는지 궁금해서. 아이의 시선은 늘 이야기의 중요한 자리를 먼저 찾아낸다.

오늘은 카타리나 마쿠로바의 <달팽이 헨리>(2022년 9월 출간)를 함께 읽었다. 이미 서너 번 정도 읽은 책이다. 손자 로리는 특히 헨리가 줄기에 매달리다 떨어지는 장면을 오래 바라보았다.
 책 표지
ⓒ 노는날
어린 달팽이 헨리는 다른 달팽이들과 다르다. 다른 달팽이들은 점액질 덕분에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착착 붙어 올라갈 수 있었지만, 헨리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달팽이에게는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헨리에게는 없었던 거다.

그런데 작가는 헨리의 부족함을 절망이나 슬픔으로 그리지 않는다. 헨리는 자기에게 없는 것을 붙잡고 주저앉는 대신, 자기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선다. 체력을 기르고, 매달리는 연습을 하며, 다른 달팽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오를 힘을 기른다. 남들처럼 쉽게 붙을 수는 없지만, 대신 버티는 힘을 키운 것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남들은 쉽게 하는데 나에게만 어려운 일이 있다. 그럴 때 사람은 자꾸 자신을 남과 비교하게 된다. 왜 나에게는 저런 면이 없을까 하고. 그런데 헨리는 없는 것을 한탄하는 대신, 있는 것을 키운다. 바로 그 태도와 노력이 작은 달팽이 헨리를 특별하게 만든다.

어느날, 헨리가 키 큰 해바라기 줄기를 타고 오르기 시작하는 장면은 그래서 더 뭉클하다. 그것은 갑자기 주어진 기적이 아니라, 조금씩 길러 온 힘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이다. 헨리는 여전히 점액질이 없는 달팽이지만, 이제는 줄기에 매달릴 수 있을 만큼 단단해졌다. 그래도 힘겹기는 하다. 그러다 헨리는 민달팽이를 만난다.

민달팽이는 헨리가 가진 집을 부러워하고, 헨리는 민달팽이의 큰 몸과 힘을 마주한다. 서로에게 없는 것을 가진 두 존재가 만나는 순간, 이야기는 부러움이나 시샘으로 그치지 않고 우정으로 발전하게 된다. 민달팽이는 헨리를 등에 업고 해바라기 줄기를 쉽게 올라간다. 그리고 헨리는 마침내 꼭대기에 닿아 정원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환호한다. 로리도 함께 손벽을 친다.

"할머니! 친구가 도와줘서 성공했어요. 내가 손으로 집어서 꽃 위에 올려주고 싶었는데 다행이야."

이 책에서 가장 흐뭇한 순간이다. 혼자서는 닿지 못했던 곳에 친구와 함께 닿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높이 올라가는 꿈이 결국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보여준다. 자기 힘을 기르는 일도 중요하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더 멀리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아이는 받아들인다.

카타리나 마쿠로바의 그림은 이 이야기를 더욱 깊이 있게 보여준다. 식물과 곤충, 자연의 풍경이 선명하면서도 표정이 풍부하다. 그림은 늘 달팽이의 눈높이에서 정원의 이곳 저곳을 보여 준다. 흙과 돌멩이, 줄기와 잎, 곤충과 꽃들이 모두 하나의 큰 세계가 된다. 높고, 아찔한 곳에서 내려다 보는 정원의 풍경에서 헨리의 작은 몸이 감당해야 하는 두려움과 간절함이 전해진다. 부드러운 색감과 충분한 여백 덕분에 독자는 헨리의 느린 시간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된다.

항상 마지막이 중요하다. 헨리의 이야기는 해바라기 꼭대기에서 정원을 내려다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뒤로 헨리는 다른 달팽이들처럼 이곳저곳을 오를 수 있게 되고, 자신이 길러 온 힘과 매달리는 재주로 서커스까지 하게 된다. 남들과 달랐던 몸이 끝내 자기만의 재능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손자 로리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리고 물어 보았다. 누구에게나 점액질 없는 부분이 하나쯤은 있을지 모른다고. 남들은 쉽게 하는데 나만 자꾸 미끄러지는 자리 같은것, 로리에겐 그런것이 무엇일까? 뜻밖의 말을 하는 로리.

"친구는 100센티인데 왜 나는 93센티야? 나는 아빠만큼 크고 힘이 세지고 싶은데... 히잉~"
"로리가 우유를 잘 안 먹으니까 그렇지. 달팽이 헨리도 힘을 키우느라고 많은 노력을 했잖아. 이제부터 로리도 우유를 많이 마시고 일찍 자는 거야."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다. 삶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없는 것을 탓하거나 안 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자기 힘을 키우고,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길을 찾는 것. <달팽이 헨리>는 그 단순하고도 깊은 진실을 들려주었다.

작고 힘없는 달팽이 헨리가 끝내 높은 곳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은 혼자 노력하고 혼자 잘 나서가 아니었다. 자기 몸을 포기하지 않았고, 할 수 있는 힘을 길렀고, 든든한 친구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용기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우정에 대한 이야기다. 다르다는 것은 결핍이 아니라, 서로의 가능성을 넓혀주는 시작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림책은 보여준다.

책을 덮고 나서도 로리는 한동안 달팽이 헨리를 이야기 하며 몇 번 더 읽어 달라고 했다. 느리게 가는 법, 자기 힘을 키우는 법, 그리고 친구와 함께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법, 나도 그 여운을 오래 붙들고 싶었다. <달팽이 헨리>는 그렇게 로리의 손에서 내 마음으로 건너온 책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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