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험대 선 K-바이오]⑤기업-병원-기관 잇는 플랫폼 구조 세워야

이성민 2026. 3. 18.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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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인공지능(AI)이 제약·바이오 시장의 판도를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 엔비디아가 글로벌 빅파마 일라이 릴리와 손잡고 10억달러(약 1조4990억원)를 들여 AI 신약 개발에 나서기로 한 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문법으로 제약·바이오 산업사(史)가 다시 쓰이는 흐름의 상징과도 같다. 후보물질 발굴에 머물렀던 AI의 영토는 정교한 임상 설계와 최적 환자군 선별, 실시간 제조 공정 제어 등 신약 개발의 전 주기로 확장하며 산업의 경제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후보물질 도출에 드는 시간을 평균 3~4년에서 최대 1년여로 단축시켰고, 표적 단백질에 대한 3차원적 이해와 독성 예측 정확도를 무기로 통상 40~65%에 머물렀던 임상 1상 성공률을 80~90%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천문학적인 매몰 비용이 발생하는 초기 실패 리스크를 줄이는 AI의 효율성은 신약 개발의 '죽음의 계곡'을 넘어야 하는 기업들에게 유일한 돌파구다. 아시아경제는 'AI 시험대 선 K-바이오'라는 기획을 통해 '속도전'으로 재편된 2026년 글로벌 신약 개발 판도를 들여다보고 우리 바이오 산업이 나아가야 할 생존과 도약의 길을 모색한다.

인공지능(AI)이 신약개발 과정에 빠르게 도입되면서 한국 바이오 산업의 전략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AI 기술 경쟁에 정면으로 뛰어들기보다 의료 데이터와 임상 인프라라는 한국의 강점을 활용해 신약개발 효율을 높이는 전략이 현실적이라는 지적이다.

글로벌 AI 신약개발 기업들의 전략도 데이터 확보에 집중되는 흐름이다. 병원 네트워크와 협력해 환자 임상 데이터를 확보하거나 제약사와 공동 연구를 통해 실험 데이터를 축적하는 방식이다. AI 기업이 단독으로 신약을 개발하기보다 제약사와 병원, 연구기관이 결합하는 플랫폼형 연구 구조가 빠르게 확산하는 것이 이런 맥락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구글 딥마인드에서 분사한 AI 신약개발 기업 아이소모픽랩스다. 18일 바이오업계에 따르면 이 회사는 일라이 릴리·노바티스와 각각 최대 17억달러(약 2조5483억원) 규모 공동 연구 계약을 체결하고 AI 기반 약물 설계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 AI 기업이 알고리즘을 제공하고 제약사가 임상 개발 경험을 결합하는 협력 모델이다. 프랑스 AI 바이오기업 오킨 역시 병원 네트워크와 협력해 환자 임상 데이터를 기반으로 AI 신약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로슈와 공동 연구를 통해 실제 환자 데이터를 AI 모델 학습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전문가들은 AI 신약개발 경쟁이 단순한 기술 경쟁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고 본다. 김도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책임연구원은 'AI 기반 신약개발 기술 동향' 보고서에서 "AI 신약개발 경쟁은 알고리즘 경쟁이 아니라 데이터와 연구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 생태계 경쟁"이라며 "병원과 제약사, AI 기업이 데이터를 공유하고 연구를 연결하는 구조가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이런 흐름이라면 한국이 선택해야 할 전략도 분명해진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한국은 글로벌 시장에서 의료데이터라는 강점을 갖고 있다"며 "이 데이터를 신약개발에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의료 데이터 인프라는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 보건의료 데이터 체계를 분석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건강보험 청구 데이터가 범위와 세부성, 적시성 측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단일 건강보험 체계를 기반으로 전국 단위 의료 이용 기록이 축적돼 있다는 점도 한국 의료 데이터의 특징으로 꼽힌다.

업계에서는 국가 차원의 컨트롤타워를 중심으로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AI 신약개발은 데이터와 임상, 기업 연구가 함께 움직여야 하는 분야인 만큼 연구개발(R&D) 지원과 데이터 활용 정책을 산업 생태계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설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은 "AI 신약개발은 데이터와 임상, 기업 연구가 함께 움직여야 하는 분야"라며 "정부 지원도 생태계 단위 전략으로 설계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윤택 제약산업전략연구원장은 "미국 식품의약국(FDA) 등에서 미충족 의료 수요가 큰 만큼 AI를 활용한 새로운 모달리티나 후보물질 발굴은 충분한 경쟁력이 될 수 있다"며 "초기 시장인 만큼 R&D 투자, 인력 양성, 해외 진출 등 정부 차원에서의 드라이브가 필요하다"고 했다.

정부는 AI 신약개발을 차세대 바이오 산업의 핵심 분야로 보고 관련 정책을 대폭 확대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달 11일 AI를 과학기술 연구 전반에 접목해 신약 개발 속도를 10배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범국가 프로젝트 'K-문샷'을 본격 가동하며 160여개 기업과 협력 체계를 구축했다.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 역시 임상 데이터 활용과 디지털 기반 임상시험을 지원하는 'K-임상 플랫폼'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아울러 국가 바이오 정책과 규제, 투자를 총괄하는 범정부 컨트롤타워인 국무총리 소속 '국가바이오혁신위원회'가 지난 3일 공식 출범하면서, 보건의료를 포함한 바이오 산업 전반의 전략 수립과 사업 조정이 한층 체계화될 전망이다.

문제는 정부의 이런 구상이 '부처별 칸막이 행정'의 한계를 뛰어넘어 실질적 결실로 이어질 수 있느냐다. AI 신약개발은 데이터와 임상, 기업 연구가 유기적으로 맞물려야만 하는데 데이터 구축과 연구개발(R&D), 임상 지원 정책이 과거와 같이 개별 단위로 추진되면 산업 생태계 차원의 전략으로써 의미를 살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바이오혁신위원회가 선언적 기구에 머무르지 않고 부처 간 정책을 묶어내는 거버넌스를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다.

AI신약 개발 기업과 바이오 기업들이 실제 임상 진입과 구체적인 사업 성과를 통해 시장의 의구심을 조속히 불식시키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박태용 갤럭스 부사장은 "과거 많은 AI 플랫폼 기업들이 기술적 비전만 강조해 시장의 피로도가 누적된 측면이 있다"며 "이제는 실제 경쟁력 있는 신약 후보물질을 만들어내고 글로벌 파트너십 등 숫자로 입증되는 사업 성과를 보여주며 가치를 증명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윤태영 프로티나 대표 역시 "만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만 앞세우고 결과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며 "AI로 설계되거나 재창조된 신약 파이프라인이 적어도 한두 개는 실제 임상 단계에 빠르게 진입하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AI 신약에 대한 업계와 자본시장의 의구심을 확신으로 바꿔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성민 기자 minute@asiae.co.kr
정동훈 기자 hoon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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