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은퇴 뒤…日, 무료로 후배 키우고 韓, 예능서 몸값 키운다 [뒤로 가는 K스포츠]

김효경, 송지훈 2026. 3. 18.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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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낳은 최고의 타자 스즈키 이치로(51)의 현재 소속팀은 ‘고베 치벤’이다. 전직 트레이너, 통역 등 지인들로 꾸린 아마추어 팀으로, 이치로는 구단주와 감독을 겸한다. 팀명은 와카야마 치벤 고교 야구부에서 따왔다. 큰 점수 차로 지고 있는데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모습에 감명받아 붙인 이름이다.

이치로는 2019년 직접 치벤고등학교를 찾아 친선 경기를 치렀다. 2021년부터는 도쿄돔에서 매년 여자 고교 선발팀과 맞붙는다. MLB 후배인 마쓰이 히데키, 마쓰자카 다이스케도 함께한다.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여자 야구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서다. 그뿐이 아니다. 틈만 나면 고교 야구팀을 직접 찾아다닌다. 타격 시범을 보이고, 기술적 조언은 물론 정신력을 기르는 방법까지 전한다.

오타니 쇼헤이, 야마모토 요시노부(이상 LA 다저스) 등 일본인 메이저리거들의 성공도 선구자 노모 히데오와 이치로가 닦아놓은 도전의 토대 위에서 이뤄졌다. 노모는 2026 WBC를 앞두고 다르빗슈 유 등과 함께 전지훈련지를 찾아 후배들을 격려했다. 계약도 없고, 직함도 없다. 그저 세대를 넘어 정신과 기술을 잇는 ‘쓰나구(繋ぐ·이어줌)’ 문화다.

일본 야구의 전설 스즈키 이치로(왼쪽)와 오타니 쇼헤이. [사진 LA 에인절스 트위터]

한국 스타급 은퇴 선수들은 현장 지도자보다 해설위원·예능·유튜브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과거엔 은퇴 직후 코치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게 관례였지만 분위기가 달라졌다. 프로야구 코치 초임 연봉은 5000만~6000만원.

유상건 상명대 대학원 스포츠ICT융합학과 교수는 “수억대 연봉을 받던 스타플레이어 출신이 적은 돈을 받고 궂은일을 하기는 쉽지 않다. 예능 출연과 유튜브 운영이 나쁜 것도 아니다. 스포츠의 문턱을 낮추고 대중과의 접점을 넓히는 순기능도 분명히 있다. 문제는 그것이 ‘전부’가 됐을 때다. 자신이 평생 몸담았던 종목에 대한 애정, 피땀으로 쌓은 업적에 대한 자부심, 뒤를 이어올 후배들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면 카메라 앞에만 서 있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레전드는 선수 시절 일부러 편한 길 대신 불편한 길을 다니면서 최고가 됐다. 그러나 은퇴 후에는 편한 길을 찾고 있다.

정신적 지주여야 할 레전드가 스포츠 생태계 안에 머물지 않으면 다음 세대에 대한 영감은 단절된다. 공백은 고스란히 후배 선수들의 내면을 파고든다. 윤영길 한국체육대 스포츠심리학과 교수는 “예전 중·고교 선수들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죽기살기로 했다면, 지금은 실업팀이나 프로팀에 들어가 어떻게 하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비싼 비용 문제도 크다. 한 골프 선수의 아버지는 “KLPGA 투어 상금이 늘면서 선수들이 배가 불러 모험을 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많지만, 모험을 하기엔 빚이 너무 많다. 청소년기에 쓴 비용이 너무 많다”고 했다. 한국 선수들은 실패하면 자신을 위해 희생한 가족까지 수렁에 빠진다는 중압감을 안고 운동한다. 일본 선수들이 경기 후 “즐거웠다(楽しかった)”를 반복할 수 있는 건 안전망이 있기 때문이다. 결과에 덜 두렵기에 도전한다.

김정효 서울대 연구교수는 “성적·진학·연봉·금메달 등 한정된 자원을 먼저 차지하려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동기에 비해 일본은 훨씬 많은 스포츠의 가치를 만들고 향유한다”고 말했다. “일본어로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잇쇼켄메이(一生懸命)’라고 하는데, 목숨을 걸고 덤벼든다는 뜻이다. 스포츠를 그렇게 대한다”고 했다.

여성 선수들은 경기력이 아니라 외모와 예능 출연으로 소비된다. “열심히 뛰는 것보다 예쁜 게 낫다”는 인식이 여성 스포츠 지망생에게 번지고 있다.

선수들이 절벽으로 내몰리는 문제는 결국 어른들의 몫이고, 정치로 귀결된다. 일본은 정권이 바뀌어도 JFA 100년 구상과 JOC 장기계획이 흔들리지 않았다. 한국은 매 정권마다 출발선으로 돌아갔다. 2016년 대한체육회와 생활체육협의회를 통합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시너지는 없고 잡음만 더 커지고 있다. 최숙현 사건 이후 엘리트 육성 투자는 위축됐고, 대안인 생활체육 활성화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일본은 한국의 태릉선수촌과 체육과학연구원을 모델로 삼아 JISS와 NTC를 같은 부지에 통합해 발전시켰다. 과학 분석이 훈련장에서 즉시 적용된다. 모델을 수출한 한국은 그것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해 밀려났다.

월드스타가 어린아이들에게 커다란 꿈을 준다. 그 꿈이 다음 세대 선수를 만든다. 박찬호 키드, 월드컵 키드, 박세리 키드가 그렇게 탄생했다. 지금은 이어줄 레전드가 없고, 꿈꾸는 선수가 줄고, 정치가 발목을 잡는다.

김효경·송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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