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투구수까지 다 던지고 싶었죠" 국대 악몽 지운 고영표, 도미니카전 삼자범퇴로 '리프레시'
-일본전 홈런 허용했지만 도미니카전서 MLB 강타자 줄줄이 제압
-"WBC 나갔던 시즌 커리어하이…올해도 기대"

[더게이트=수원]
KT 위즈의 '수원 화성 지킴이' 고영표에게 최근 참가한 몇 번의 국제대회는 악몽으로 남았다.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호주전 패전 투수, 2024 프리미어12 타이완(대만)전 2이닝 6실점. 특히 타이완전 대패는 한국의 조별리그 탈락으로 이어지며 고영표 개인의 아픔을 넘어 대표팀 전체의 상처로 남았다.
이번 2026 WBC 역시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최종 엔트리 발표 직전까지 승선이 불투명했다가 문동주의 부상 이탈로 가까스로 기회를 잡았다. 선발 등판한 일본전에서는 홈런 세 방을 내주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대로 끝났다면 또 한 번의 잔혹사로 남을 뻔한 여정. 그러나 마이애미에서의 마지막 등판에서 고영표는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의 불씨를 찾았다.

"전략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류지현 감독의 한일전 고영표 선발 기용은 의외의 결정이었다. 통상 한일전에는 가장 강한 에이스를 내세우는 게 관례. 하지만 류지현 감독의 셈법은 달랐다. 일본전 다음 날 바로 타이완전이 예정된 상황에서 8강 열쇠는 타이완·호주전에 달려 있다고 봤다. 류현진, 곽빈, 데인 더닝 세 장의 에이스 카드를 그쪽에 맞춰두고, 나머지 등판 가능한 투수 중 최상의 카드로 고영표를 택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고영표 역시 이런 구상을 모르지 않았다. 대회 기간 현장 인터뷰에서 자신의 일본전 기용이 '의아했다'고 했던 고영표는 "감독님의 전략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면서 "8강을 위해 타이완을 잡아야 했으니까. 내가 그 구조 안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고 밝혔다.
결과는 아쉬웠다. 1회 스즈키 세이야에게 속구를 공략당해 2점 홈런을 내줬고, 3회에는 오타니 쇼헤이와 스즈키에게 커브를 던지다 한 이닝에만 두 방의 홈런을 맞았다. 평소 주무기인 체인지업 대신 포수 사인에 따라 커브를 던진 게 화근이었다. "커브로 홈런을 맞은 게 너무 아쉬웠다"는 말에서 자신의 최고 무기로 승부하지 못한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났다.
그대로 대회를 마쳤다면 이번 WBC 역시 아쉬움으로만 남았겠지만, 극복할 기회가 찾아왔다. 한국이 극적으로 8강에 진출하며 성사된 14일 도미니카공화국전. 마이애미 론디포파크 마운드에 등판할 기회가 주어졌다. 0대 7로 뒤진 4회말, 상대 타석에는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 매니 마차도, 오닐 크루즈 등 MLB의 괴물 타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오금이 저릴 법한 강타자들 앞에서 고영표는 마음을 다잡았다. "최대한 체인지업을 많이 던져보자." 결과는 최상이었다. 강타자 게레로 주니어를 2루 땅볼로 처리했다. MLB 올스타에 7차례 선정된 마차도는 볼카운트 2볼 2스트라이크에서 117km/h짜리 체인지업에 방망이를 헛돌렸다. 201cm의 거구 크루즈도 3구 만에 중견수 뜬공. 단 12구로 삼자범퇴, 그 중 7개가 체인지업이었다.
도미니카전 호투의 의미에 대해 고영표는 "체인지업에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면서 "일본전의 아쉬움을 잊고 리프레시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름값이나 몸값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내 피칭에만 집중했다"고도 했다.

2023년처럼...'커리어하이'의 예감
WBC 여정은 고단했다. 도쿄에서 마이애미, 다시 알래스카를 경유해 갔다가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전세기 좌석은 "미끄럼틀처럼 대각선으로 눕는 구조"라 숙면이 쉽지 않았다. 마이애미 도착 직후에는 "몸은 자고 있는데 정신만 깨어 있는 느낌"으로 캐치볼을 소화해야 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MLB 타자들을 돌려세웠다. 자신이 지닌 최고의 무기로 정면 승부해서 얻은 결과이기에 더 값졌다.
도미니카전 패배로 대표팀의 여정은 멈췄지만, 고영표는 소중한 자신감을 챙겨 수원으로 돌아왔다. 20일 키움전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실전 감각 조율에 들어가는 그는 묘한 징크스 하나를 소개했다. "돌아보니 WBC에 나갔던 시즌에 항상 커리어하이에 가까운 성적을 냈더라고요. 올해도 살짝 기대하고 있습니다."
고영표는 2023년 WBC 출전 후 12승 7패 평균자책 2.78로 최고의 한 해를 보낸 바 있다. 자칫 악몽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국가대표 여정을 희망으로 바꾼 국대 잠수함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라커로 향했다. 도미니카 타자들을 잠재운 잠수함 에이스의 체인지업이 다시 한번 수원 마운드에서 춤을 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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