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다음날 발발한 전쟁, 이스라엘은 피해자였을까?

정환빈 2026. 3. 17.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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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판 환단고기 ⑥] 150년 동안 이어진 분쟁의 원인

[정환빈 기자]

▲ 중동판 환단고기 6편 건국 다음날 발발한 전쟁, 이스라엘은 피해자였을까?
ⓒ 정환빈
다음은 가자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아흐마드 아리프 후세이니의 인터뷰 내용이다. 이 기사가 보도된 시기를 맞춰보라.
현재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 유일한 화제는... 시온주의 문제다. 모두가 이를 두려워하고 염려한다.

아마 독자들은 이 발언이 최근 전쟁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한 세기도 전인 1914년에 팔레스타인 현지 언론 〈알이끄담(Al-Iqdām)〉에 실린 기사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시발점으로 거론되는 밸포어 선언보다도 앞선다.

단순화된 서사 때문에 혼동되지만, 분쟁은 1880년대에 시온주의가 시작된 시점부터 이미 존재했다. 다만 이 시기에는 팔레스타인인과 시온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으로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다 1917년에 영국이 밸포어 선언으로 유대 민족의 고향을 약속하면서 갈등 구도가 유대 민족 전체로 확장되고, 민족 분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1948년에는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아랍 민족도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이처럼 세월이 흐르며 정치적 대립의 구도는 변화했으나, 분쟁의 원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달라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여태껏 국내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무수한 오해를 낳아 왔다.

예를 들어 1948년 전쟁을 보자. 국내를 비롯해 많은 서구 국가에서는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아랍 국가들이 침공했다고만 설명한다. 이러한 서술에는 '이유'가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아랍 국가들이 인종적·종교적으로 폭력적이라서 이스라엘을 공격했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심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이스라엘이 건국된 곳은 팔레스타인이다. 자기네 영토를 빼앗긴 것도 아닌데 아랍 국가들이 굳이 침공할 이유가 있었을까? 게다가 당시는 유럽의 강제 지배에서 독립한 지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원정을 나설 여력도 없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아랍 국가들이 유엔에서의 입지를 악화하면서까지 정규군을 파견할 가능성은 낮다고 분석했다. 그런데도 아랍 국가들이 '침공'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해답은 지난 150년을 관통해 온 분쟁의 원인에서 찾을 수 있다.
▲ CIA 보고서(1947.11.28.) 이스라엘이 건국되어도 아랍 국가들이 전면전을 벌이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 Public Domain
갈등의 이유

19세기 말까지도 팔레스타인은 전통적인 농경 사회의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다수 농민은 명목상으로 정부가 소유한 국유지(miri land)를 대대로 경작했으나, 아랍 지역에서는 경작자가 토지의 주인이라는 관념이 강해서 스스로를 실질적인 주인으로 여겼다. 이는 사유지에서 소작하는 농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지주가 바뀌더라도 소작권은 침해하지 않는 관습 덕분에 소작지에는 요람부터 묘지까지 세대를 이어 살아가는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런데 1880년대에 시온주의가 창시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팔레스타인은 "버려진 땅"이라는 선전 아래 유럽에서 수만 명의 유대인이 이주해 왔다. 그중 대부분은 도시에 정착했으나, 일부는 농지를 산 후 소작농을 추방하고 자신들만의 마을을 지어 '식민촌(colony)'이라고 불렀다. 졸지에 삶의 터전과 생계 수단을 잃어버린 소작농들은 분노했고, 때때로 식민촌을 습격했다. 아랍인들의 저항을 본 몇몇 시온주의자들은 '포용적인 식민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시온주의자 이츠하크 앱스테인(1907): 이스라엘 땅[즉, 팔레스타인]에서는 토지의 소유주가 바뀌더라도 소작농은 유지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토지를 살 때는 기존의 소작인들을 추방합니다. 빈손으로 쫓아 보내지는 않고 많은 보상을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주거지에서 내쫓고 그들의 생계 수단을 빼앗은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가진 것도 거의 없이 쫓겨난 사람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Yitzhak Epstein, "A Hidden Question," HaShiloah, 17, July-December, 1907, quoted in Alan Dowty, "'A Question That Outweighs All Others': Yitzhak Epstein and Zionist Recognition of the Arab Issue," Israel Studies 6, no. 1 (2001): 39-41.

'시온주의자 하임 칼바리스키(1919): 처음 토지를 매입한 순간부터 우리와 아랍인들의 관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베두인(아랍 유목민)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요람을 떠나야만 하는 불운을 애도하며 노래했지요. 그 노래들은 심금을 울렸고, 그들이 얼마나 토지와 결착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난 25년간의 식민 활동으로 저는 많은 아랍인을 그들 땅에서 추방했습니다.'
Abigail Jacobson, From Empire to Empire: Jerusalem Between Ottoman and British Rule (Syracuse: Syracuse University Press, 2011), 164.

그러나 대다수 시온주의자는 아랍인과 공존하거나 그들의 문화를 존중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을 쫓아내는 게 '아랍 문제'의 바람직한 해결책이라 믿었다. (5편 참조) 자연히 아랍인들은 시온주의자들의 의도를 눈치챘고,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민족적 저항을 도모했다. 가령, 1914년에 현지 언론 <팔라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을 그들 민족의 것으로 되찾고 인구를 늘려 그들만의 땅으로 유지하려는 정치 집단이다... (시온주의를 용인해 온 오스만) 정부는 우리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고, 우리가 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시온주의자들에 의해 사라질 위협을 받는 민족이라는 믿음을 바꿀 수도 없다.'
Neville J. Mandel, The Arabs and Zionism before World War I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6), 180-1.

민족적 저항이 막 궐기할 무렵 1차대전(1914-1918)이 발발했다. 오스만 제국은 무너지고,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해 강제 통치를 시작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 통치의 명분과 협력자로 시온주의자들을 선택해 아랍의 독립운동을 견제했다. 이른바 식민주의 통치술로 악명 높은 분할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이었다.

영국의 후원하에 시온주의 운동은 급성장했다. 더 많은 유대인이 이주해 오고, 더 많은 토지를 사들였다. 시온주의 문제는 이제 소작농의 권리 침해에서 농촌 전반이 당면한 위협으로 심화했다. 개간할 수 있는 땅이 동이 나, 더 이상 인구 증가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1930년 영국의 홉 심슨 위원회는 농촌 인구의 80% 이상이 농사 지을 땅이 부족해 충분한 소득을 거두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계급으로서의 농민 인구는 절망적으로 파산했다"라고 말했다.

시온주의자들은 이런 현상을 만석 기차에 빗대어 설명하며 반겼다. 만석인 기차에 누가 탑승하면 기존 승객 중 누군가는 내려야 하듯, 유대인을 꾸준히 이주시켜서 아랍인의 "자발적인" 인구 이전을 유도하자고 옹호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농민들은 생계 수단을 모조리 잃더라도 인접 국가로 떠나지 않았다. 도시의 판자촌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분노를 키울 뿐이었다.

홉 심슨 위원회의 보고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영국은 유대 이주와 토지 매입을 제한하기로 했다. 그러나 시온주의자들의 외교적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불과 4개월 만에 결정을 뒤집었다. 게다가 1933년에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고 반유대주의가 심해지자, 유대인의 이주는 급증했다.

시온주의가 시작된 1880년대에 유대 인구는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의 5%에 불과했다. 1922년 영국 통치 초기에도 11%에 머물렀다. 그러나 1936년에는 30%에 달했다. 이 같은 추세라면 수년 이내에 유대인이 다수 인구로 부상하고 팔레스타인은 더 이상 아랍 땅으로 불리지 않게 될 상황이었다. 1936년, 농촌과 도시 모두의 아랍인들은 고향을 잃게 될 위협 앞에 하나로 뭉쳤고, 마침내 거국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전쟁을 선택한 것은 누구인가

영국은 여느 식민지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즉시 군사 탄압에 나섰다. 아랍인들은 반년 동안 저항을 이어갔으나, 1000명이 무참히 학살당하자 결국에는 투쟁을 멈췄다. 이후 1937년 7월에 영국은 갈등의 '해결책'으로 팔레스타인을 삼등분해 아랍 국가(67%), 유대 국가(19%), 위임통치령(14%)으로 분할하자고 제안했다. 아랍 영토로 지정된 지역에서 거주 중인 유대인과 유대 영토의 아랍인 간에는 강제적인 "인구 교환"이 권고되었다.

시온주의 지도부는 역사상 처음으로 유대 국가의 건국이 공식적으로 제안된 사실에 환호했다. 그러나 이보다도 반가운 소식은 강제 이주가 거론되었다는 점이었다. 훗날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가 되는 다비드 벤구리온은 1937년 7월 12일 자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강제 이주는... 우리가 자립했던 (고대 이스라엘의) 제1, 제2 성전기 때도 가지지 못했던 것을 줄 수 있다.. 이것은 국가나 정부, 주권 이상의 의미가 있는, 독립적인 고향에서 민족적 연대를 만드는 것이다.'
Ben-Gurion's Diary, July 12, 1937, quoted in Benny Morris, The Birth of The Palestinian Refugee Problem Revisit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47.

한 달 후 열린 제20차 시온주의자 대회에서 벤구리온은 이 점을 들어 영국의 분할안에 찬성하자고 설파했다. 할양된 영토(19%)가 작다는 내부 불만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했다.
'300만 명의 유대인이 유대 국가에 들어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미래 세대는 자신들의 이익을 스스로 돌볼 것이고, 우리는 우리 세대의 일을 신경 써야 합니다.'
Anita Shapira, "The Concept of Time in the Partition Controversy of 1937," Studies in Zionism 6, no. 2 (1985): 215.

사실, 영국이 그린 유대 국가의 국경은 결코 작지 않았다. 당시 유대인들이 소유한 토지는 팔레스타인 전체 면적의 5%에 그쳤는데도, 거의 네 배에 가까운 면적을 부여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시온주의자들의 영토욕은 충족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얻어낼 것인가? 벤구리온은 10월 5일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유대인을 (유대) 국가로 받아들여야 한다. 200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다고 굳게 확신한다... 우리는 발전된 방위군을 조직할 것이고 그 군대는 세계 최고 수준의 군대가 되리라 믿는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이웃의 아랍인들과 협정이나 이해로, 혹은 다른 수단을 동원해 팔레스타인의 나머지 지역에 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JPS Responds to CAMERA's Call for Accuracy: Ben-Gurion and the Arab Transfer," Journal of Palestine Studies 41, no. 2 (2012): 247-8.

결과적으로,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의 제안을 현 시점에서는 거부하되, 더 유리한 조건을 협상하기로 했다. 반면, 아랍인들은 투쟁을 멈췄던 것을 후회하고 다시 무기를 들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의 특수부대(Special Night Squads)의 일원으로 '반란' 진압 작전에 공식적으로 참여했다.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이 특수부대는 아무 마을에나 들이닥쳐 총을 난사하거나, 주민들을 줄 세운 뒤 무작위 순번대로 총살해 아랍인들에게 공황을 일으켰다. 시온주의자들은 독자적으로 테러 작전도 전개했다. 시장이나 버스 등 공공장소에서 고성능 폭탄을 던져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십 명씩 사살했다.

2년의 투쟁 끝에 아랍인들은 무기를 내려놓았다.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대부분의 마을이 집단 처벌을 받아 생계를 버거워했다. 이렇게 '반란' 진압을 성공리에 끝내자, 영국은 갑자기 유대 국가 계획을 철회하고 10년 이내로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약속했다. 유혈사태로 아랍권 전역에서 반영 감정이 고조된 상황인데, 독일이 전쟁을 일으킬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영국이 계획을 번복하자 이번에는 시온주의자들이 투쟁을 선포했다. 대영 투쟁은 2차 세계 대전(1939-1945)이 끝난 이후에 더 확산했고, 1946년에는 킹 데이비드 호텔의 별관을 폭파해 91명을 죽이고 476명을 다치게 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팔레스타인 역사상 최악의 폭탄 테러로 남아 있다.
▲ 킹 데이비드 호텔 테러 1946년 7월 22일, 시온주의자들이 예루살렘에서 킹 데이비드 호텔 별관을 폭파시켰다.
ⓒ Public Domain
이듬해 1947년 11월, 미국과 소련의 주도하에 유엔 총회는 갈등의 '해결책'으로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43%)와 유대 국가(56%), 그리고 국제관리지구(1%)로 분할하기로 결의했다. 유대 영토는 인구비(33%)나 소유한 토지(6.6%)보다 훨씬 넓었기 때문에 시온주의자들은 반색하며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1937년에 영국이 추진한 분할안과는 달리 유엔의 계획에는 '인구 교환'이 포함되지 않았다.

유대 영토로 지정된 지역에는 50만 명의 유대인과 더불어 40만 명의 아랍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대로 국가를 건설하면 유대 '민족' 국가가 될 수 없었다. 시온주의자들은 곧장 군사 작전에 나서 아랍 마을을 하나둘씩 파괴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CIA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파괴당한 마을의 수가 서른 개에 이르자 미국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고, 분할안을 취소하고 신탁통치로 대체하자고 제안했다. 경각심을 느낀 시온주의자들은 쐐기를 박기 위해 1948년 4월 1일부터 전격적으로 인종청소에 나섰다.

데이르 야신은 인종청소의 사례로 가장 널리 알려진 아랍 마을이다. 4월 9일 새벽, 시온주의자들은 데이르 야신을 기습 공격했다. 이 마을은 이전부터 유대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고, 최근에는 평화협정까지 체결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전략적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150명 내외의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시신을 매장하는 과정을 감독한 유대인 군인은 이렇게 증언했다.

'전적으로 야만적이었다. 몇몇을 제외하면 모든 사망자가 노인과 여성, 어린아이였다. 우리가 본 시신은 모두 부당한 희생자였고 누구도 손에 무기를 쥐고 있지 않았다.'
Daniel McGowan and Matthew C. Hogan, The Saga of the Deir Yassin: Massacre, Revisionism andReality (Geneva: Deir Yassin Remembered, 1999), 10.

다음은 영국 관리가 다른 마을로 도망친 생존자들을 면담하고 보고한 내용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유대인들에 의해서 많은 성적 잔학행위가 자행되었다. 많은 여학생이 강간당한 뒤에 도륙당했다. 나이 든 여성들 역시 희롱당했다… 많은 영유아도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귀걸이를 빼앗기는 과정에서 귀가 찢긴 여성들도 있었다.'
David Hirst, The Gun and the Olive Branch: The Roots of Violence in the Middle East (London: Faber and Faber, 1977), 126.

아랍 각지에는 인종청소를 피해 팔레스타인에서 도망쳐 온 피란민들이 넘쳐났다. 그들이 전한 소식은 아랍 민족을 공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각국 정부는 민심의 폭발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4월 30일에 팔레스타인 형제자매들을 구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영국의 통치가 공식적으로 종료되는 날이 5월 15일이었기 때문에 이때까지는 기다리기로 했다. 그 하루 전날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었고, 15일부터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의 원인은 인종청소였다

서론에서 말했듯이, 국내에서는 아랍 국가들이 왜 이스라엘을 공격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아랍 국가들이 "침략"했다고 말할 뿐이다. 그런데 1948년에 총 400~500개의 마을이 파괴되고 75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난민이 되었다. 그중 전쟁 발발 이전에 파괴된 마을이 200개고, 난민이 25만~30만 명에 이른다. 그렇다면, 전쟁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겠는가.

인종청소는 종종 전쟁으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두둔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시온주의자들이 1880년대부터 구상해 온 추방 계획의 연장선에 있었고, 전쟁 발발 이전부터 실행되어 전쟁 중에도,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일례로, 전쟁에서 완연히 승기를 잡은 이후인 1948년 10월 29일에 이스라엘군은 다와이마 마을에서 인종청소를 저질렀다. 학살 직후 현장에 도착한 유대인 군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정복자들은 1차로 80~100명의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을 죽였습니다. 어린이들의 경우에는 몽둥이로 머리를 박살 내서 죽였습니다. 시체가 없는 집이 없었습니다… 한 지휘관이 공병에게 할머니 두 명을 집 안에 집어넣고... 폭파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공병은 거부했습니다... 지휘관은 휘하의 병사들에게 같은 명령을 내렸고, 악행은 행해졌습니다. 한 군인은 여성을 강간한 후 총으로 쏘아 죽였다고 자랑했습니다. 갓난아기를 안고 있던 여성은 군인들이 식사한 자리를 청소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하루이틀 동안 일했으나, 군인들은 끝내 그녀와 갓난아기를 사살했습니다... 더 적은 아랍인이 남을수록 더 좋다는 원칙이 추방과 잔학행위의 정치적 동기였습니다.'
Morris, Birth of Palestinian Refugee, 4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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