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백스페이스 [취재진담]

기자는 쓰는 사람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오히려 지우는 시간이 더 길었다. 누군가의 삶을 글로 옮기는 일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랐다. 삶과 죽음을 다룬다는 건 언제나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그 책임의 무게만큼 백스페이스를 눌러왔다.
지난해 10월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난 간내 담도암 4기 환자는 치료비 이야기를 꺼내며 울먹였다. “어떤 사람이 병원 벤치에 앉아 울고 있는 모습을 봤어요. 손수건을 건네며 ‘저도 항암치료 중’이라고 말을 걸었더니 그분이 ‘경제적 부담 때문에 치료를 그만둬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어요. 남 일 같지가 않더라고요.”
작년 12월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만난 복막 전이 위암 환자는 포항과 서울을 오가며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다. HER2(인간 표피 성장 인자 수용체 2형) 표적치료제를 제외하면 치료제 선택이 제한적이었다. HER2 음성 위암 환자들에게 효과적인 세계 최초의 클라우딘 18.2 표적치료제가 등장했지만, 비급여인 탓에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환자는 치료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치료받으며 ‘우리 딸내미 교복 입은 모습을 꼭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어요. 잘 치료받아서 그 바람을 꼭 이루고 싶습니다.”
표적항암제와 면역항암제, 신약이라는 이름은 달콤한 희망처럼 들리지만, 그 가격표는 때로 절망에 가깝다. 건강보험 급여 적용을 받지 못한 약은 한 달 치료비가 수백만원을 넘기도 한다. 그동안 건강보험 보장성을 넓히고 산정특례제도를 확대해 왔지만, 비급여 신약 영역은 환자 개인의 부담으로 여겨진다.
취재는 현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병원을 오가며 흘린 땀은 집에 돌아와서야 식었고, 인터뷰 도중 겨우 삼킨 눈물은 원고를 쓰다 다시 차올랐다. 녹취 파일을 반복해 들으며 새벽 2시를 넘겨서야 저장 버튼을 눌렀다. 저장 직전까지도 백스페이스를 눌렀다. 혹시라도 기사가 인터뷰이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을지, 혹시라도 내 판단이 오만하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묻기 위해서였다.
희귀질환 아이를 둔 부모와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의 어머니는 기자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아이 이름이 기사에 꼭 나왔으면 좋겠어요. 이 병이 있다는 걸,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세상이 알았으면 해요.” 그 간절함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아이가 평생 짊어질 삶의 무게도 떠올랐다. 이름을 적었다가 다시 지웠다. 가명으로 바꿨다가 다시 본명을 썼다. 기록과 배려 사이에서 수십 번 백스페이스를 눌렀다.
때로는 질문 자체를 지우기도 했다.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었지만, 굳이 파헤치지 않아도 되는 영역이라는 판단이 설 때면 질문을 접었다. 지난 2024년 11월 경기 일산의 한 병원 호스피스센터에서 만난 희귀암 환자는 “암이라고 해서 24시간 내내 아픈 건 아니에요. 오늘은 좀 덜 아프네요”라며 웃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였던 그의 웃음이 얼마나 많은 통증을 감추고 있는지 알았기에 질문을 고쳐 썼다. 날 것 그대로의 고통을 옮기는 대신 그가 지키고 싶어 한 존엄을 옮겨 적기로 했다. 그렇게 점점 백스페이스는 글을 고치는 기능 이상의 의미가 됐다. 감정에 휩쓸린 자신을 다잡는 장치였고, 취재원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흔적이었다.

취재 현장에서 만난 이들의 삶은 대개 제도와 맞닿아 있다. 암환자의 약값 부담은 건강보험 보장성과 약가 제도의 문제로 이어지고, 희귀질환자의 치료 접근성은 신속 등재와 재정 배분의 문제로 연결된다. 제한된 재정 안에서 소수 환자를 위한 고가 치료제를 어디까지 보장할 것인지, 사회적 합의와 재정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무엇 하나 해법이 쉽지 않다.
중증·희귀질환자들의 말을 노트북에 받아 적다가 몇 번이나 멈춰 섰다. ‘막대한 비용’이라고 썼다가 고치고, ‘생명을 돈으로 저울질한다’는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 치료 기회가 경제적 여건에 따라 갈릴 때 환자는 병마뿐 아니라 비용 부담과도 싸워야 한다. 분노는 쉽다. 그러나 현장의 복잡한 맥락을 단순화하고 싶지 않았다. 제도는 한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재정에도 한계가 있다. 백스페이스를 누르며 생각했다. 이 문장은 누군가의 고통을 소비하지 않으면서 제도의 빈틈을 제대로 짚고 있는가.
정부와 국회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고민과 배려가 많기를 바란다. 수없이 토론하고, 수정하고, 현장의 의견을 반영하는 자리. 그 자리가 닳을 만큼 치열해야 한다. 정책은 하나의 문장과 닮았다. 문장에는 주어와 목적어가 있고, 정책에는 대상과 목적이 있다. 문장이 잘못 쓰이면 오해를 낳듯, 정책이 성급하게 설계되면 부작용을 낳는다. 그 영향은 되돌리기 어렵고, 때로는 치명적이다.
취재하다 보면 현장과 정책 사이의 간극을 자주 목격한다. 의도는 선했지만, 준비가 부족했던 정책, 속도를 우선하다 현장의 목소리를 충분히 담지 못한 결정들이 있다. 그 성급함은 고스란히 약한 이들의 몫이 된다. 정책은 현장에서 살아 숨 쉬며 사람들의 삶을 바꾼다. 암환자의 치료 일정이 달라지고, 생애말기 환자의 선택지가 넓어지고, 희귀질환 가족의 부담이 덜어질 수 있다. 그 변화는 신중한 결정에서 시작된다.
새 노트북의 백스페이스는 아직 멀쩡하지만, 점차 닳아갈 것이다. 앞으로도 누군가의 삶을 기록하며 수없이 지우고, 고치고, 망설일 것이다. 그 지움이 더 나은 기사를 남길 거라고 믿듯 정책의 숙고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를 바란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Copyright © 쿠키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吳, 국힘 지도부와 ‘쇄신’ 씨름 끝 출마 결단…‘혁신 선대위’ 전면전 선포
- 국민의힘, 지방선거 앞두고 ‘세대교체’ 승부수…“청년과 함께 미래 지킬 것”
- 한강버스 감사, 특혜 의혹은 무혐의…정치 공방은 ‘현재진행형’
- 野 불참 속 공소청법 법사소위 통과…검찰 수사·기소 분리 수순
- 美 ‘군함 파견’ 압박에…안규백 “국회 동의 필요, 아직 공식요청 없어”
- ‘검찰개혁’ 입법 급물살…행안위 소위서 중수청법 與 주도 의결
- “팔로워 1명당 쓰레기 1개”…SNS 공약이 바꾼 우리 동네 [쿠키청년기자단]
- 카카오뱅크 한때 접속 오류…원인은 “프로그램 충돌”
- 할리우드 시상식에 등장한 농심 ‘신라면’…봉지째 생라면 먹방 ‘눈길’
- 대미투자특별법 국무회의 통과…2조 규모 ‘한미전략투자공사’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