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10년 만에 오스카 여우주연상, 이보다 잘 어울릴 순 없다

김성호 2026. 3. 1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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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1293] <햄넷>

김성호 평론가

마땅한 결과다. 제시 버클리가 오스카의 주인이 된 것 말이다. 1989년 생, 올해로 37살이 된 아일랜드 출신 배우는 영화계에 진출한 지 꼭 10년 만에 연기자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안았다. 영화계 동료들이 투표하는 배우조합상, 비평가들의 평가를 받는 크리틱스 초이스, 그리고 골든 글로브에 이어 미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까지 여우주연상을 차지한 것이다. 클로이 자오의 <햄넷>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아내를 연기한 걸로 얻은 영예다.

제시 버클리의 작품은 한국서 두 편이 함께 상영 중이다. 하나는 앞서 '씨네만세'서 다루었던 메기 질렌할의 <브라이드!>. 스타 제이크 질렌할의 누나로 유명한 메기 질렌할이 첫 작품 <로스트 도터>에 이어 또 한 번 제시 버클리를 기용했다. 배우 출신 감독으로 배우를 보는 데 탁월한 눈을 지닌 그녀가 고르고 고른 재능이 제시 버클리다. 그리고 제시 버클리는 제 재능을 독보적인 연기로 확인케 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작품에서 그녀가 맡은 배역을 이보다 훌륭히 소화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제시 버클리는 내면에 깃든 힘, 감정과 감각을 표면 위로 끌어올려 드러내는 데 탁월하다. 관객은 제시 버클리가 짓는 표정과 몸짓, 또 비범한 목소리며 눈빛으로부터 그녀 안에 깃들어 있는 에너지를 감각한다. 표면과 그 아래 잠긴 것을 이어내는 이 배우의 천성적이라 해도 좋을 솜씨로부터 관객은 줄거리며 대사 따위로는 이해할 수 없던 것까지 본능적으로 이해한다. 작품을 그 작품이 가진 것 이상으로 이끌어내는 흔치 않은 광경을 제시 버클리의 출연작들 가운데 흔히 마주할 수 있을 테다.
▲ 햄넷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제시 버클리, 그녀에게 오스카를 안긴 영화

<햄넷>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이 꼭 그렇다. 제시 버클리가 아니었다면 영화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배우 한 명, 그 존재가 있고 없음으로 하여 캐릭터, 나아가 작품이 그 수준과 품격, 가치를 달리하게 된다는 걸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길들여지지 않을 게 분명한 원초적 힘이 깃든 목소리가 그렇고,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 기묘하고 야성적인 웃음 또한 그렇다. 저처럼 슬프고 기쁜 것들에, 추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또 거침없고 조심스런 것들에 빠르고 깊이 빠져드는 힘이 놀랍다. <브라이드!>, 또 <햄넷>을 본 이라면 누구나 제시 버클리가 이제껏 보아왔던 수많은 배우 가운데 특별함을 지닌 그리 많지 않은 특별한 이라는 걸 이해하리라 믿는다.

제시 버클리에게 오스카를 안긴 <햄넷>은 어떤 영화인가. 역사가 따로 기록하지 않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아내, 앤 해서웨이의 이야기를 다뤘다. 매기 오페럴의 팩션 <햄닛>을 원작으로, 튼실한 시나리오와 클로이 자오의 개성 있는 연출이 높은 수준에서 조화를 이룬 인상적 작품이다. 충분한 기록이 없어 베일에 싸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삶을, 그와 가장 가까이 관계 맺은 아내를 통하여 읽어내는 작업이 <햄넷>의 정체성이라 해도 좋다.

셰익스피어가 아니라면 구태여 앤의 이야기를 오늘 소환할 이유는 없을 테다. 앤은 이제껏 존재했던 수많은 사람, 여성, 아내, 어머니 중 한 명일뿐, 그리 특별하고 새로운 이는 아니니까. 그러나 문학 사상 최고로 꼽히는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아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셰익스피어가 낳은 수많은 걸작들이 어떻게 탄생하게 된 것인지가 베일에 싸여 있는 상황에서 그에 영향을 미쳤을 게 분명한 사람과 사건을 다루는 건 그 자체로 중요하며 의미 있는 일이 된다. 앤은 셰익스피어에게, 또 그의 작품에 다가서는 열쇠인 것.
▲ 햄넷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셰익스피어에게 이르는 특별한 방식

그러나 <햄넷>의 아름다움은 셰익스피어의 아내를 그저 문을 열고 더는 돌아볼 필요가 없는 도구쯤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야기는 틀림없이 셰익스피어와 그 걸작 <햄릿>을 향하지만, 동시에 그 뒤에 있는 이들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 앤(아녜스)을 비추는 것이 셰익스피어에게 닿는 길이 되고, 마침내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해를 이룩함으로써 앤의 이야기 또한 완성해낸다. 더없이 가까우면서도, 그래서 더 고통스럽게 찢어져야 했던 두 사람의 닿음이 이 영화 가운데 이어지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를 이뤄내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걸작이다. 작품이 그를 쓴 작가를 구원하고 그에게 가장 가까운 이를 구원하며, 나아가 그들과 마찬가지의 또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가 닿는다. 이야말로 예술이 이를 수 있는 가장 고아한 경지가 아닌가.

아는 이는 알겠으나 햄넷은 셰익스피어의 아들이다. 셰익스피어는 32살 되던 1596년에 아들 햄넷을 잃는다. 맏딸 수잔나, 그 아래 두 살 터울의 쌍둥이 햄넷과 주디스를 가졌던 셰익스피어다. 쌍둥이가 태어난 직후 고향을 떠났단 기록이 있을 뿐, 가정생활과 가족과의 관계를 추측할 만한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셰익스피어다. 분명한 건 셰익스피어가 11살 난 아들을 잃고 4년 뒤 <햄릿>을 발표했다는 것. 일련의 희극이 연달아 큰 성취를 거두며 그 재능을 인정받은 셰익스피어가 그 대표작인 위대한 '4대 비극'을 내놓기까지, 그 아래 저 자신이 겪은 비극이 결정적 자극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참척, 그러니까 인간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이라는 자식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인간 셰익스피어가 겪었다. 그러나 그 상실은 오로지 셰익스피어만의 것은 아니다. 그보다 여덟 살 많은 아내 앤에게도 꼭 같은 아픔이 있었으리라. 영화는 셰익스피어보다도 더 철저히 감춰진 아내를 상상으로 되살려 이어지고 갈라지며 다시금 이어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저 유명한 <햄릿>의 탄생과 함께 복원해낸다.
▲ 햄넷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예술이 마땅히 닿아야 하는 사람에게 닿을 때

시간을 건너 살아남은 그리 많지 않은 진짜 이야기, 예술로써 인간과 삶의 진실에 닿은 걸작은 그저 태어나는 법이 없다. 지혜, 그리고 진실한 아름다움들은 삶과 그 이면에 잠든 것을 오래도록 응시한 뒤에야 겨우 닿을 수 있는 때문이다. 비극이 마땅히 품고 있는 아름다움들도 마찬가지다. 상실과 그에 따른 고통, 어둡고 꺼려지는 온갖 것들을 헤치고 나아가야 그에 이를 수 있다. 셰익스피어라 해서 다르지 않았을 테다.

hamlet(햄릿)과 hamnet(햄넷), 그 닮음으로부터 <햄넷>은 셰익스피어가 오래 보았던 아픔이 무언지를 꺼낸다. 그리고 그 결과로써 만들어진 걸작이 마땅히 닿아야 하는 사람에게 닿는 순간을 허락한다. 관객은 실제로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있었어야 하는 그 순간을 <햄넷> 안에서 목격한다.

<햄넷> 속 특별히 극중 극인 '햄릿'의 공연 장면은 파괴적인 감상을 일으킨다. 셰익스피어가 마주한 상실과 고통은 '햄릿' 속 왕자의 것으로 전이되고, 그를 보는 이의 것으로 옮겨간다. 다분히 기본에 충실하여 연출한 그 순간은 동시에 영화와 연극이 지닌 힘을 알도록 한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나 그 여정에서 얼마 다르지 않은 감정과 감각을 공유한 이들이 같은 이야기로부터 같은 감상을 마주하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이야말로 참된 예술이 가진 아름다움이다.

좋은 예술이란 사람을 움직인다. <햄넷>에서 만난 제시 버클리의 연기는 근래 마주한 탁월한 예술이다. 그녀가 2026년 오스카의 주인이 된 건 마땅한 결과다.
▲ 햄넷 포스터
ⓒ 유니버설 픽쳐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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