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들 고성 지르고 뛰쳐나갔던 곡, 1년 뒤 기립박수
피아노 하나 못 치는 사람이 음악 에세이를 쓴다는 게 말이 될까? 말이 된다고 말하고 싶다. 예술 감상은 모두에게 열려 있으므로. 문학과 예술이 삶의 경험 속에서 다채롭게 녹아들 이 글이 당신을 예술 감상의 충동으로 몰고 갔으면 좋겠다. 예술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찾아온다는 편견을 찢고, 자기 삶을 예술로 만들려는 창조의 충동으로 이어지면 좋겠다. <기자말>
[박형숙 기자]
봄은 어떤 소리로 오는가? 미풍이 살랑거리는 소리? 겨우내 말라 있던 거무죽죽한 가지에서 푸릇한 움이 싹트는 소리?
지난 2월 청주에 있는 미디어 날의 유튜브 <다독다독> 인터뷰를 위해 고속도로를 탄 적이 있다. 작년에 출간하여 부마민주항쟁문학상을 받았던 연작소설집 <모경의 빛> 인터뷰를 위해서였다.
미리 받아본 질문지에는 '봄의 전령처럼 오셨다'는 인사말이 있었다. 어떤 인사로 답변할까? 운전하고 있는 차창 앞, 고속도로 위로 눈발이 날리는 게 보였다. 진눈깨비처럼 날리던 눈발은 갈수록 굵어져 이천을 지날 무렵에는 전면 유리창 위로 곤두박질치듯이 쏟아져 내렸다. 눈길에 미끄러지면 어쩌나. 운전대를 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문득 떠올랐던 음악,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바순의 신비로운 고음으로 시작되는, 그리고 곧 이은, 지층 밑에서 들려오는 격렬한 박동 소리처럼 콘트라베이스를 비롯한 현악기들이 현을 갈아대듯 튕겨내는 소리. 아, 그렇지. 봄은 절대로 얌전히 오지 않지. 이렇게 격렬하게, 지금 저 유리창 위로 마구 달려드는 눈발처럼 오지. 그렇게 생각하자 유리창에 온몸으로 부딪쳐 오는 눈들이 분분히 떨어지는 흰 꽃잎처럼 여겨졌다.
봄은 어떤 음악으로 오는가
70년대에 보낸 어린 시절에는 동요 <고향의 봄>이 있었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노래 구절처럼 울긋불긋한 꽃들이 잔뜩 핀 꽃 대궐이 어린 시절에 꿈꾸던 봄의 정경이었다. 지금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정경. 그 시절, 이 노래에 맞춰 손바닥 치기를 하던 기억은 스마트폰을 끼고 노는 21세기의 어린아이들은 맛볼 수 없을 거다.
조금 커서는 가곡 <봄 처녀 제 오시네>가 어른거렸다. 지금은 구시대적 유물로 들리는 처녀라는 단어. 하지만 70, 80년대의 한국에서 봄과 처녀는 종종 동일시되었다. 한국의 봄 처녀는 모네의 <양귀비 들판>의 여자들과는 달랐다. 붉은 양귀비 들판을 내려오며 모자와 양산을 쓴 우아한 차림의 서양 여자들과 달리 한국 처녀들은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고 어느 푸릇한 들판에서 막 돋아나는 쑥이며 냉이 같은 나물을 캐고 있을 것만 같았다.
클래식에 눈을 뜬 뒤에 사로잡힌,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도 있다. 이 소나타를 들을 때마다 거장 베토벤이 표현한 그 미묘하고 생기발랄한 봄의 표현에 매번 감탄하고 놀라게 된다. 초상화 속 베토벤의 모습, 사자 같은 머리에 눈을 부릅뜨고 곧 야단이라도 칠 듯한 얼굴을 떠올리면 소나타 봄의 미묘한 선율이 그의 작품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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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
| ⓒ 위키미디어 공용 |
스트라빈스키와 관련한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많이 전해진다. 많은 문학가와 예술가가 그랬듯이 집안에서 강권한 법률가의 길을 저버리고 예술의 길을 택했던 것이라든지, 우리에게는 '왕벌의 비행'으로 잘 알려진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사사 받았던 일이라든지, 그가 속해 있는 정교회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사촌과 결혼했다든지, 그런 뒤 한참 후에 베라 드 보세라는 무용수와 바람이 나서 이십여 년간 밀회를 이어갔다든지, 부인이 죽자 보란 듯이 이혼도 하지 않은 베라 드 보세와 같이 살았다든지.
하지만 스트라빈스키에 관한 가장 멋진 에피소드는 첫 <봄의 제전>의 대 실패일 것이다. 그 실패에 대해 말하기 전에 내가 스트라빈스키와 가까워지게 된 계기를 말해야 할 것 같다. 몇 개의 다리를 건너 어딘가에 도달하는 우여곡절의 이야기처럼 나와 스트라빈스키 사이에도 디뎌야 할 여러 개의 중간 다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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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 스틸컷 |
| ⓒ 엘 데세오 |
여기에 나오는 피나 바우슈의 발레에 반했는데, 그 피나 바우슈가 두 번째 징검다리이다. 팬이 된 나는 마침내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보게 되었다. 피나 바우슈가 작고한 다음 해인 2010년. 서울 역삼역 부근에 있던 LG아트센터 무대에 올려졌던 공연은, 영화 <그녀에게>에도 등장하는 <카페 밀러>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2차 대전 후의 상처 가득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듯, 넋이 나간 남녀가 의자들만 무질서하게 놓여 있는 무대 위를 휘청거리며 걸어가다 실신하듯 쓰러지는 <카페 밀러>도 좋았지만, 최소한의 무대장치로 바닥에 깔린 진흙 위에서 격렬하게 군무를 추는 <봄의 제전>은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때까지 나는 발레는, 해마다 크리스마스 무렵 으레 무대에 올려지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 인형>이 전부인 줄 알았다. 백조처럼 우아한 자태의 발레리나가 깃털처럼 펼쳐진 발레복 튀튀를 입고 새의 날갯짓처럼 하늘거리는 몸짓을 하는 무용 말이다. 피나 바우슈가 연출한 현대 발레는 전혀 달랐다. 의상도 몸짓도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살색의 슬립을 입어서 거의 옷을 입은 거 같지 않은 여자 무용수들과 하의에 걸친 검은 스타킹만으로 흡사 검은 사제단을 연상시키는 남자 무용수들. 그 안에서 도드라지는 붉은 천. 공연이 시작되면 한 여자가 붉은 천 위에 엎드려 있다. 자신이 희생양일까 두려워하는 몸의 율동. 공포와 불안은 다른 여자들에게도 차례로 이어져, 한차례 씩 격렬한 몸짓을 토해낸다. 온몸을 비틀고, 상체를 빠르게 뒤로 꺾고, 쓰러질 듯 좁은 무대 위를 달려 나가고, 자해하듯 팔로 자기 복부를 찌른다.
강렬하게 두드려 대는 북소리와 함께, 흡사 대지의 진동인 듯 격렬한 몸의 떨림으로 이어지는 군무와 함께, 바닥에 깔린 진흙이 튀어 오르는 그 동시적 감각은 스트라빈스키라는 천재적인 작곡가의 음악이 피나 바우슈라는 탁월한 무용가에 의해 어떻게 재해석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풍요를 기원하며 처녀 한 명을 대지의 신에게 바친다는 고대 신화. 고대 신화는 왜 여성에게 특히나 어린 여성에게 이토록 잔혹한가. 그 잔혹함을 피나 바우슈는 무용수들이 추는 격렬한 춤으로, 무용수들의 율동에 드러난 고통의 생생한 감각으로 재현했다. 실존과 고통의 몸짓. 이것은 피나 바우슈의 전매특허 같은 키워드이다. 과연 스트라빈스키는 무슨 생각으로 이 곡을 작곡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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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년 선보인 피나 바우슈의 ‘봄의 제전’ |
| ⓒ LG아트센터 |
하지만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처음 공연되었을 때 그들은 <봄의 제전>의 혁신성에 고성과 야유를 퍼부어 댔다.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에 그 초연 장면이 생생하게 나와 있다. 요란한 음악과 괴상망측한 무용수들의 동작이 펼쳐지는 중에 흥분한 관객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고성을 질러대고 거기에 다른 관객이 호응하는 아수라장 같은 장면이.
1막이 끝날 무렵, 경찰까지 동원이 되었다고 하니 가히 그 소동을 짐작할 만하다. 초연 당시 나왔던 불평과 비난은 찬사로 기울어져 파리지앵들은 일 년 뒤 <봄의 제전>에 기립박수로 화답했고 현재에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가운데 최고의 걸작 중 하나이자 20세기의 음악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봄의 제전>에서 들려오는 귀를 찢을 듯한 불협화음을 듣다 보면 어느 순간, 낯선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부드러운 은유 속에 갇혀 있던 우리 내면의 원시성, 저 고대의 원시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와 우리의 유전자 속에 억눌려 있을 그런 생명력이 약동하는 것만 같다. 어느덧 희생 제의를 펼쳤던 고대인의 마음도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식민지 시대와 지난 80년대까지 봄은 늘 시대에 대한 은유로만 쓰였다. 많은 시(詩) 속에서 현재는 혹독하고 추운 겨울이었고, 시인은 봄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지난 2024년 12월 3일 우리는 봄을 다시 한번 그런 은유의 세계로 내몰 뻔했다. 그러나 여의도에서, 광화문에서, 여러 광장에서 울려 퍼졌던 소리가 봄을 구출했다. 광장에서 들려왔던 이 소리야말로 봄이 오는 격렬한 소리들이 아니었을까. 풍요를 기원하며 대지의 신에게 바쳐야 하는 것은 나이 어린 처녀가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생각들과 지난 시대의 망령들일지 모른다. 죽은 망령들에서 이제는 산 것을 꽃피워야 할 때.
봄은 어떤 소리로 오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 내면의 무엇을 희생해서 삶의 풍요를 기원해야 하는 것일까? 다양한 연주자 다양한 안무가에 의해 각기 다르게 표현된 <봄의 제전>을 보다 보면, 어느새 예술이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바닥 안에 와 있다고 느끼게 된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모니터라면 더 좋겠다. 봄이 오는 격렬한 소리에 잠시라도 넋을 잃을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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