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사벽 된 일본 스포츠…농구 2진에 지고, 야구는 11번 연속 졌다 [뒤로 가는 K스포츠]

이이지마 사키(飯島早紀). 일본 여자 농구리그에서 10년 넘게 수비와 궂은일을 맡던 식스맨이었다. 은퇴 수순을 밟다 지난해 한국으로 건너와 약체 BNK와 하나은행을 최상위권으로 끌어올렸다. 이번 시즌엔 올스타 인기투표 1위가 됐다. 팬들은 그의 이름 ‘사키’를 따 ‘사기캐’라는 별명을 붙였다. 게임 속 사기 캐릭터처럼 압도적이라는 뜻이다.
이 장면 하나가 지금 한일 스포츠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국 야구는 일본에 11연패 중이다. 1990년대 이전까지 일본을 압도했던 축구는 2020년 이후 3연패다. 지난 1월 23세 이하 아시안컵에서는 한국이 주전을 내보내고 일본은 2년 뒤 LA올림픽을 겨냥해 21세 중심으로 팀을 꾸렸는데도 0-1로 완패했다. 삼일절에는 남자 농구 대표팀이 일본 2진에게 졌다. 한국의 자랑이었던 여자 골프마저 최근 2년간 메이저 우승 수가 1대 4로 일본에 밀린다.
구기 종목 전반에서, 한꺼번에 역전당했다.

스포츠는 근대 이후 한국이 일본을 처음으로 이긴 분야였다. 경제력으로는 일본을 쳐다보기도 어려웠던 시절,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꿈을 줬다. 김정효 서울대 연구 교수는 “지금 1인당 GDP에서 한국이 일본을 앞선 것은 스포츠가 심어준 희망 덕분인지 모른다. 그러나 K반도체·K팝·K드라마·K뷰티가 세계를 누비는 지금, 스포츠가 가장 먼저 정점을 찍고 내려오고 있다”고 했다.
토양이 사라지고 있다.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저변이 무너지는 중이다.
지난 11일 새벽 5시 20분, 서울 한 아이스링크에 A선수의 스케이트 소리가 울려 퍼진다. 초등학생은 너댓 명에 불과하다. 수십 년간 한국 빙상 스타를 배출한 ‘금메달 공장’ 링크의 기계가 멈춰 서고 있다. 한 코치는 “10~15년 전에는 김길리나 임종언 같은 뛰어난 선수들이 서로 경쟁하며 자랐는데, 지금은 선수가 너무 적다”고 한숨을 쉬었다.
쇼트트랙 최민정이 태어난 1998년 출생아는 64만 명이었다. 김길리가 태어난 2004년엔 47만 명, 2025년엔 25만 명이다. 학교 운동부 쇼트트랙 선수는 2022년 117명에서 올해 23명으로 급감했다. 쇼트트랙은 기록이 아닌 순위 경쟁인데, 선수가 한 명뿐이라 대회에서 홀로 트랙을 도는 기이한 광경마저 벌어진다.

인구 1800만 명의 네덜란드, 540만 명의 노르웨이가 축구와 올림픽에서 꾸준히 정상급 선수를 배출하는 건 스포츠를 즐기는 인구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의 학교 체육은 공동화됐다. 민원과 안전사고 부담에 체육 수업은 뒷전으로 밀리고, 학교 운동부도 하나둘 사라진다. 코치들은 체벌로 오해받을까 봐 적극적인 지도를 주저하고, 선수들은 자율 훈련에 적응하지 못한 채 아노미 상태에 빠져든다.
일본의 힘은 부카쓰(部活動)다. 방과 후 동아리 활동에 중학생 85%, 고등학생 70% 이상이 참여한다. 인기 종목은 거의 모든 학교에 팀이 있다. 부카쓰는 대입 평가 요소인 동시에 학창시절 꼭 거쳐야 할 ‘청춘의 상징’이다. 군(郡)과 현(県) 선발전을 통과해 인터하이(전국 고교체육대회)나 고시엔(고교야구 전국대회)에 나가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된다.
재일교포 오영길 OK읏맨 럭비 감독은 “나도 부카쓰로 럭비를 배웠다. 한국에서 군대 얘기를 하듯, 일본에서는 학창시절 몸담은 스포츠 얘기를 한다”고 말했다.

그 학교 동아리에서 만화 같은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NBA LA레이커스의 루이 하치무라는 한 친구가 쉬는 시간마다 찾아와 “농구하자”고 졸라대는 바람에 농구부에 들어갔다. 농구 만화 ‘슬램덩크’를 보며 지도자의 꿈을 키운 코치가 “넌 NBA에 갈 재목”이라고 했고, 하치무라는 그 말을 믿었다. 배구 만화 ‘하이큐’ 현실판으로 불리는 이시카와 유키는 부카쓰에서 성장해 이탈리아 리그 파워발리 밀라노에서 뛰고 있다. “운동과 학업 양쪽에 최선을 다했던 경험이 집중력을 키웠다”는 그의 말은 운동에 올인하지 않으면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한국 스포츠계가 새겨들어야 한다.
일본도 인구는 줄고 있다. 부카쓰의 과부하 문제를 인식하고 지역 클럽으로 전환하는 개혁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참여하는 학생 수는 유지되고, 지역 클럽-엘리트 센터-프로로 이어지는 사다리도 건재하다.

반면 한국은 엘리트 길을 택하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고, 실패하면 인생이 끊겼다. 학습권 보장을 위한 최저학력제를 도입했지만 탁구 신유빈처럼 아예 고교를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의 학교 스포츠는 엘리트도, 일반 학생도 만족 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는 “엘리트와 일반 학생이 공존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일본에서 30년 걸린 모델이니, 한국은 2050년 결실을 보겠다는 긴 호흡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박린·이해준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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