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양파가 가르쳐준 ‘때’를 아는 지혜

개구리 입이 떨어진다는 경칩이 지나고 꽃샘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오후 4시면 어김없이 마을 둘레길을 산책하러 나가곤 하는데, 나는 오늘도 털모자를 눌러쓰고 농업박물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황량한 들엔 쌀쌀한 날씨 탓인지 아직 농부들이 보이지 않았다. 농업박물관 부근에는 넓은 양파밭이 있는데, 밭 주인이 홀로 비닐을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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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확철임을 알리기라도 하듯
초여름이면 옆으로 눕는 양파 잎
공존의 문법, 식물에서 배워야
」

나는 걸음을 멈추고 양파밭 주인과 인사를 나누었다. 오랜만이네요. 이제 비닐을 걷을 때가 됐군요. 사내도 나를 보고 무척 반가워했다. 겨우내 비닐 속에서 추위를 견디다 얼굴을 드러낸 밭을 보니 어린 양파 잎들이 새파랗게 살아 있었다. 사실 강원도 지역에는 기후가 맞지 않아 양파를 심지 않았었다. 양파를 재배하기 시작한 건 기후 변화로 날씨가 따뜻해진 2~3년 전부터. 양파밭 주인을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강원도 토박이인 나는 양파의 생태를 잘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 마을에 처음 양파를 재배하기 시작한 사내를 통해 양파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재작년 초여름 어느 날 양파 농장 옆을 지나는데, 양파 잎들이 일제히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어, 이거 무슨 일? 폭염 때문인가? 나는 쓰러져 있는 양파들을 궁금한 시선으로 들여다보고 있는데, 마침 앙파밭에서 풀을 뽑고 있던 사내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왜 저렇게 푸른 양파 잎들이 다 누웠죠?” 사내가 웃으며 대꾸했다.
“도복(倒伏)이라고 하는데요. 양파는 저렇게 옆으로 쓰러지면서 수확해야 될 때가 되었다는 걸 미리 알려주는 거예요. 저 죽을 때를 모르는 사람보다 낫죠!” “와, 정말 똑똑한 식물이군요.”
양파밭 주인은 식물이 저 죽을 때를 모르는 사람보다 낫다고 했지만, 식물을 연구해온 학자들은 식물도 인간 못잖은 지능이 있다고 말한다. 진화생물학자인 찰스 다윈도 숱한 실험을 통해 더 진화하거나 덜 진화한 생물은 없다고 못박음으로써 식물도 지능이 있는 존재임을 밝혔다.
식물의 뿌리 부분에는 식물의 활동을 제어하는 일종의 두뇌 역할을 하는 지휘본부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런 다윈의 주장을 양파와 연관 지어 상상해보면, 수확철이 가까워진 양파의 뿌리가 잎들에게 ‘도복’을 명령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결실의 때가 되었으니 더 이상 꼿꼿이 서서 광합성을 하느라 애쓸 필요가 없다고.
양파는 이처럼 때를 아는 지혜를 통해 사람에게 자신을 먹거리로 내어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는 약으로 선택되기도 한다. 양파뿐 아니라 대부분의 식물들이 자신의 건강에 필요한 것보다 많은 양의 화학물질을 만들어낸다는 건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
식물들은 이처럼 치유물질의 분비를 통해 식물군락과 생태계의 건강을 지켜주는 것이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사람이 병이 들면 그 병을 치유하는 데 필요한 식물이 나타나서 환자가 그 식물을 발견하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그렇다면 식물은 다른 식물이나 곤충, 고등동물과 같은 자신의 주변의 존재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가운데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능적 생물이란 말이 아닌가.
하여간 나는 그날 양파밭에 쓰러져 누워 매사에 때가 있음을 가르쳐준 양파들을 곰곰이 생각하며 ‘현자 양파’라는 시를 써서 발표했다. “(…) 그래서 양파는 벗기고 벗겨도 또 벗길/ 깊은 속을 지니게 된 거라고/ 그래서 양파는 저를 까는 사람 눈물 쏙 빼놓을 만큼/ 매운맛을 지니게 된 거라고.”
시절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몸을 뉘어 도복할 줄 아는 양파의 모습에서 나는 생의 엄숙한 지혜를 읽는다. 양파는 자신이 돌아가야 할 때를 명확히 알고 있지만, 사람들처럼 떠벌리지 않고 고요한 침묵 속에 제 몸을 낮추어 ‘깊은 속’을 채울 뿐이다.
그 속에는 자신을 내어주어 다른 생명을 살리는 치유의 에너지와, 맵싸하지만 정직한 향기가 응축되어 있다. 비우고 내려놓아야 할 때를 아는 것, 그리고 묵묵히 타인을 위한 향기를 준비하는 것. 어쩌면 우리 인간이 평생을 걸쳐 배워야 할 공존의 문법을, 저 푸른 양파들은 이미 온몸으로 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고진하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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