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에서 강원도까지, 가슴 떨리는 마지막 압권
[나일영 기자]
지난 12일, 충청북도 충주에서 국토 종주의 마지막 도인 강원도 땅 원주시 부론면에 들어섰다. 해남 땅끝점에서 도보 국토종주를 시작한 지 34일 만이다. 강원도 땅을 밟은 다음날인 13일은 문막읍까지 걷는 일정이었다. 문막으로 가는 정해진 길이 있음에도 국토종주의 뜻을 보다 더 진하게 충족하기 위한 결정을 했다. 지금은 잊힌 길을 통해 문막에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전국의 길을 여기저기 찾아 걷던 나로선 오래 전부터 많이 궁금했던 길이 '별바라기볼렛길'(2019년 여주시 조성)이다. 세종천문대가 있는 청정 지역의 특징을 길 이름에 녹여낸 길이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잘 모르는 길이 되었다. 수풀이 덮이고 새 장애물이 생겼을 수 있다.
목적지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면 이 같은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한발 한발 내딛는 '걷기'라는 행위는 목적지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목표를 완성하기까지 제한된 거리와 시간 안에 어떻게 걸었고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가 중요하다. 그것이 힘든 과정일수록 성취감은 증폭된다. 그래서 고민 끝에 용단을 내렸다. 같이 걷는 단원들께 취지를 설명하니 힘든 모험길이 될 줄 알면서도 오히려 더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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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론독립만세기념비 물길 따라 경제와 여론의 중심이 됐던 부론면은 원주의 3.1 독립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
| ⓒ (사)한국사람길 |
충청북도, 경기도, 강원도의 3도의 접경지인 원주 부론면은 경기도와 충청북도를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위 아래로 걸친 중심에 있다. 강을 통한 수운이 절대적이던 옛날, 영서 영동의 남부 지방의 세곡을 모아 저장하던 흥원창이 부론면에 있었고 자연히 경제의 중심이 됐다. 사람이 모여들다보니 여론도 모여 나라의 정책 입안에 이 지역의 여론을 듣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면 이름이 '부할 부(富)'와 '논할 논(論)'의 부론면이 된 이유다.
사람 따라 소식이 가장 먼저 도착하고 여론이 가장 먼저 형성되던 곳에서 3.1운동 소식을 들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분이 끓어올라 만세 운동에 나섰을 것이다. 부론면의 법천리, 손곡리, 노림리가 남한강, 섬강, 청미천의 세 물이 모이는 세물머리의 흥원창이 있던 중심 지역이라는 것이 원주 독립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된 이유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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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강길 2코스 세물머리길 원주시 부론면의 둑방길은 남한강이 섬강과 만나고 다시 청미천과 만나 서울로 흘러가는 세물머리의 경승을 볼 수 있는 길이다. |
| ⓒ (사)한국사랆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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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물머리 돈도, 사람도, 여론도 모였던 세물머리에서 남한강을 바라본다. 좌편에 남쪽에서 올라온 남한강과 우편에 북쪽에서 내려온 섬강이 만나 정면(서쪽) 방향인 서울로 흘러간다. |
| ⓒ (사)한국사람길 |
이곳에서 남한강과 작별하고 섬강변으로 걷는다. 둑방길이 아닌 섬강변 고수부지의 오븟한 길에서 어느 길보다 편안함을 느낀다. 이 길로 섬강교를 건너면 편안함은 끝나고 오늘 작정한 모험이 시작된다.
3도 접경지를 온 몸으로 느낀다고 해야 할까. 어제 남한강대교로 충북에서 강원도로 들어왔고, 오늘 섬강교를 따라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들어선다. 섬강교 남쪽으론 섬강의 고요한 물줄기가 흐르고, 북쪽으론 자산과 푸른산 사이의 절벽을 뚫고 나온 영동고속도로가 섬강 위를 시원스레 달리고 있다. 우리는 북쪽 절벽 아래 섬강변으로 길을 헤치고 걸어가야 한다.
"길이 어딘지 보이지가 않네."
"사람들이 다녔던 길이니 가면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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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바라기볼렛길 섬강을 피부로 체감하는 자연 강변을 걷고 강안 절벽 위에 1971년 세워진 성락정에 들른다. |
| ⓒ (사)한국사람길 |
절벽 위 성락정
정자에 올랐다. 시멘트 골조로 단단히 지어진 정자다. 기둥에 머릿돌처럼 박아넣은 돌판에 '1971년 5월 25일 준공, 설립자 농장주 동보 김종락(東寶 金鍾洛)'이라고 한자로 쓰여있고, 성락정(聖洛亭)이라고 쓴 현판도 도리에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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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락정에서 바라본 섬강 태기산에서 발원한 섬강이 영동을 잇는 영동고속도로와 섬강교 밑을 흘러 남한강에 합류하는 강 하류의 풍경을 여과 없이 바라본다. |
| ⓒ (사)한국사람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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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바라기볼렛길3 문명이 주는 인위적 포근함이 아닌, 설렘이 더 강력한 자연이 주는 포근함을 느끼며 섬강변을 걷는다. |
| ⓒ (사)한국사람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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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마섬유원지 없어진 길의 데크전망대에 올라 차박 성지였던 가마섬유원지와 섬강을 바라본다. 우리의 풍요롭고 포근한 자연을 지키는 것이 급선무가 되었다. |
| ⓒ (사)한국사람길 |
별바라기볼렛길이 끝난 이곳 부평리 입구엔 우리나라 역사 지리서의 창시인 <동국지리지>(1615)의 저자 한백겸의 묘와 신도비가 서 있다. 한백겸은 주체적 합리적 역사 인식에 기반해 고증과 실증적 방법으로 역사를 연구해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조선 정치사에서 가장 잔혹한 피바람을 불러왔던 기축옥사의 발단인 정여립 모반사건의 주인공 정여립의 시신을 거둬 정성스럽게 장사 지내 준 인물이다. 이 때문에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당쟁에 끼어들지 않고 관직도 사양하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했던 그를 기리는 신도비를 뜻하지 않게 마주할 수 있었던 행운이 이 길을 걸으며 얻은 네 번째 쾌감이다. 부평리 어귀의 버스 정거장 부스를 바람막이 삼아 좌판을 깔고 단원들이 둘러앉아 간식을 먹었던 행복한 쾌감도 빼놓을 수 없다.
42번 국도가 등골산 아래의 부평터널(1999년 준공)로 지나가면서 이곳 등골산과 삿갓봉의 등골고개를 구불구불 넘어 강원도로 들어서던 운치는 사라졌다. 대신 우린 빈 채 남아있는 옛 도로를 전세 낸듯 걸으며 고개 넘어 다시 원주로 들어섰다.
섬강이 넓고 기름진 충적평야를 형성한 곳의 중심에 문막읍 반계리가 있다. 드넓은 들판 한가운데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무척 평화로워 보인다. 길게 뻗은 원문로를 따라가다 원심천을 넘으면 왼쪽에 반계리 은행나무가 있다. 높이 32m(아파트 11층 높이), 나무 둘레 16m에 이른다.
삼국시대부터 살아온 은행나무
단풍철이 아니어도, 멀리서도 그 큰 위용에 경외감이 저절로 인다. 수령을 800~1000년으로 추정하다 과학의 발달로 2024년에 1317살로 밝혀졌다. 올해 나이 1320살로 삼국시대부터 살아온 국내 최고령 은행나무다. 그런데도 시들어가기는 커녕 줄기와 가지가 균형미를 이루고 해마다 무성하게 단풍을 피우며 자라는 기상이 압권이다.
은행나무는 공룡보다 일찍 신생대에 지구에 나타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화석' 같은 나무다. 수령도 길어 많은 전설을 간직하며 신목으로 역할해 왔다. 경외심을 갖고 영험한 기운을 받으러 단원들이 은행나무 돌이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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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계리 은행나무 1320년 수령의 반계리 은행나무를 만나는 것은 단풍철이 아니어도 경외감과 영험한 기운을 받기에 충분하다. 잎이 없어 힘차게 뻗어간 맨 얼굴의 나무 줄기를 보는 맛이 일품이다. |
| ⓒ (사)한국사람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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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행나무돌이 한트 국토종주 단원들이 반계리 은행나무의 영험한 기운을 받는 은행나무돌이를 하고 있다. |
| ⓒ (사)한국사람길 |
우리의 삶이 원래 그렇다. 하루 앞,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삶을 살면서 모든 걸 아는 듯 자만하는 인생의 궤적에서 나와 가끔은 아무것도 의지할 것 없는 벌거숭이가 돼볼 필요가 있다. 모르는 것, 가보지 않았던 것을 열어젖히는 도전이 바로 그런 것이다.
가보지 않았던 미지의 길로 모험을 택했던 도전은 참 많은 것을 주었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느낀 감동과 자연이 준 포근함, 뜻하지 않은 위인을 추억할 수 있었던 행운, 길가에 앉아 단원들과 느낀 행복, 영감과 위로를 주는 비상한 존재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었다. 힘들게 해서라도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경험하며 더 많이 기억에 남기는 도전은 결국 나의 일부가 되어 내 삶의 자양분으로 살아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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