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물가 방패로 꺼낸 ‘석유 최고가격제’…부작용은 더 크다
유가 통제의 정치학…싸게 보이는 ‘착시효과’
전문가들 “시장 왜곡과 재정 부담 함께 따져야”

정부가 29년 만에 석유 최고가격제를 다시 꺼내 들었다. 1997년 유가 자유화 이후 처음 이뤄진 직접 가격 통제다. 휘발유와 경유는 생활물가의 체감도가 가장 높은 품목 가운데 하나다.
주유소 가격판 숫자가 오르면 곧바로 장바구니와 물류비, 생산비 부담으로 연결된다는 인식도 강하다. 정책당국 입장에서는 가장 눈에 띄는 가격을 먼저 붙들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정부도 유가와 환율을 민감하게 보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 1월 통화정책방향 자료에서 향후 물가경로가 국제유가와 환율 움직임, 정부의 물가안정 대책 등에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통계청 기준 2월 석유류 물가는 전년동월대비 2.4% 하락했다. 그러나 한국은행은 여전히 높아진 환율과 국제유가 변동을 물가 상방 리스크로 보고 있다. 지금은 유가가 다소 안정돼 보일 수 있어도, 외부 충격이 겹치면 다시 가격 불안이 번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최고가격제가 곧바로 해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이미 이 제도를 거쳐본 나라다. 대한석유협회 자료에 따르면 국내 유가 제도는 1948년부터 1969년까지 고정가격제,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최고가격제, 이후 연동제를 거쳐 1997년 유가 자유화로 전환됐다.
지금 국내 정유사는 싱가포르 국제 석유제품 가격과 환율, 유통비용 등을 반영해 공급가격을 산정하는 구조를 따르고 있다. 다시 말해 지금의 유가 체계는 시장 연동형이다. 최고가격제는 과거 방식에 가깝다.
현재 정부 대응도 가격 상한보다는 세금 조정에 무게가 실려 있다. 법정 세율은 휘발유 ℓ당 529원이다. 하지만 정부의 유류세 한시 인하 조치에 따라 오는 4월 30일까지는 492원이 적용되고 있다.
경유 역시 법정 375원에서 같은 기간 337.5원으로 인하된 상태다. 정부가 시장가격 자체를 직접 틀어쥐기보다 세 부담을 줄여 소비자 가격 상승폭을 완화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셈이다.

가격을 묶는 순간 비용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석유 최고가격제가 직관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소비자가 보는 가격만 낮추면 당장 부담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부 정책과 달리, 시장에서는 가격이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공급과 수요, 원가와 재고, 수입 여건을 반영하는 신호로 작동한다. 이 신호를 행정적으로 누르면 부담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곳은 정유사와 유통업체다. 국제가격과 환율이 오르는데 국내 판매가격만 상한으로 묶이면 그 차액은 민간 사업자의 마진 축소나 손실로 쌓일 수밖에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에너지 가격 통제가 취약계층에 집중되지 않은 채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다”며 “원가 이하 가격을 만들 경우 공급망 상류에 큰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많이 쓰는 소비자일수록 더 큰 혜택을 얻는 구조라는 점도 문제로 꼽는다.
이 손실이 길어지면 다음 단계는 공급 위축이다. 수입을 줄이거나 재고를 보수적으로 운용하게 되고, 유통망의 가격 경쟁도 왜곡될 수 있다.
결국 소비자는 싼 가격표를 보게 될지 몰라도, 실제로는 원하는 시점에 충분한 물량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어려워질 수 있다. 가격을 낮춘 대가가 품절과 대기, 유통 혼란으로 돌아오는 구조다.
세계은행은 이런 부작용을 여러 나라 사례로 정리했다. 가격 규제를 장기간 유지하면 국제가격과 국내가격이 괴리되고, 보조금 비용이 커질 뿐 아니라 연료 부족, 암시장, 밀수 같은 문제가 함께 나타난다고 봤다.
지난 2022년에는 가격 규제를 둔 국가 가운데 45개국이 연료 부족을 겪었고, 이 중 25개국은 가격을 수개월 이상 동결한 나라들이었다. 연료 부족이 단지 개도국의 특수 사례가 아니라 가격 신호를 지운 정책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결과라는 의미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민간 손실을 정부가 떠안기 시작하면 이번에는 재정 부담이 불어난다. 소비자 가격을 낮게 유지하려면 결국 세금을 깎거나 보조금을 주거나, 공기업과 민간기업의 손실을 다른 방식으로 메워야 한다.
눈앞의 유가를 잡는 대신 미래의 세 부담이나 기업 투자 여력을 갉아먹는 방식으로 부담이 뒤로 미뤄지는 셈이다.

단기 처방보다 선별 지원이 더 현실적
이 때문에 국제기구들은 대체로 같은 방향을 권고한다. IMF는 국제가격 상승분의 국내 전가를 막는 광범위한 가격 억제책보다 취약계층에 대한 현금지원 같은 표적 지원이 더 비용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에너지 가격을 모두에게 똑같이 눌러주는 방식은 예산 소요가 크고, 정작 절실한 계층에 집중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이 원칙은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유가 불안이 커질 때 정부가 검토할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은 최고가격제보다는 유류세 조정, 화물·운수업계 한시 지원, 저소득층 에너지 바우처, 취약 업종 선별 지원에 가깝다.
시장가격 자체를 묶기보다 충격을 크게 받는 계층과 업종을 골라 보완하는 편이 왜곡이 적고 재정 효율도 높다. 현재 정부가 실제로 가격 상한보다 세율 인하를 택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석유 최고가격제는 정치적으로는 이해하기 쉬운 정책이다. 국민이 체감하는 숫자를 직접 낮춰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정책은 보이는 가격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비용까지 계산해야 한다. 가격을 묶는 순간 정유사 손실, 공급 위축, 재정 부담, 에너지 절약 유인 약화라는 청구서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정부 안팎에서는 석유 최고가격제가 단기 처방으로는 일정 부분 효과를 낼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한국은행은 국회 서면답변에서 “(최고가격제가) 소비자 부담을 일시적으로 줄여준다”고 밝혀 급등기 충격 완화 효과를 인정했다. 다만 도입 기간이 길어질수록 초과수요와 시장 왜곡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고 선을 그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팔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라며 정유사의 공급 유인이 약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역시 “유가와 환율이 함께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최고가격제가 실행하기 쉽지 않다”고 진단했다.
국제기구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IMF는 “가격을 일률적으로 억제하는 방식보다 충격이 큰 계층에 지원을 집중하는 선별 지원이 비용 측면에서 더 효율적”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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