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면서도 낯선, 무대 위의 권유리 [D:P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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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무대.
연극 '말벌'(THE WASP)은 권유리라는 배우의 스펙트럼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 증명하는 짜릿한 무대다.
무대 위 화려한 퍼포먼스는 물론, 예능과 유튜브 채널에서 보여준 소탈하고 긍정적인 모습은 대중이 그를 친근하게 느끼는 가장 큰 이유였다.
권유리는 삶에 찌든 카알라의 무거운 발걸음과, 속물적이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처절한 생존 본능을 날 것 그대로 쏟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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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무대. 억척스럽고 거친 임산부 카알라가 서 있다. 입에 붙은 험한 말과 경계심 가득한 눈빛. 우리가 알던 ‘소녀시대 유리’는 그곳에 없다. 연극 ‘말벌’(THE WASP)은 권유리라는 배우의 스펙트럼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 증명하는 짜릿한 무대다.

대중에게 권유리는 오랫동안 ‘건강한 에너지’의 상징이었다. 무대 위 화려한 퍼포먼스는 물론, 예능과 유튜브 채널에서 보여준 소탈하고 긍정적인 모습은 대중이 그를 친근하게 느끼는 가장 큰 이유였다. 대중매체가 소비해 온 그의 이미지는 늘 밝음과 유쾌함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권유리는 늘 안전한 길 대신 도전을 택하며 자신만의 서사를 구축해 왔다. 드라마 ‘동네의 영웅’(2016) ‘피고인’(2017) 등을 통해 차근차근 연기 경험을 쌓은 그는, 2021년 사극 ‘보쌈-운명을 훔치다’에서 단단한 내면을 지닌 화인옹주 역을 맡아 MBN 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을 이끌며 주연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이어 ‘굿잡’(2022)에서는 돈세라 역으로 유쾌한 코믹 연기를, ‘가석방 심사관 이한신’(2024)에서는 광역수사대 에이스 형사 안서윤 역을 맡아 강렬한 액션까지 소화했다.
매체 연기에만 머문 것도 아니다. 2019년과 2020년, 연극 ‘앙리할아버지와 나’ 무대에 오르며 관객과 직접 호흡하는 무대 연기의 기본기를 다졌다. 2024년 개봉한 영화 ‘돌핀’에서는 화장기를 완전히 지우고 삶의 변화를 두려워하는 소도시 청년 나영 역을 맡아 담담하고 묵직한 일상 연기를 선보였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벗어나 장르와 매체, 규모를 가리지 않고 묵묵히 쌓아온 이 단단한 연기 근육이 ‘말벌’이라는 작품을 만나 폭발한 셈이다.

이 폭발력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극 ‘말벌’이 가진 서늘하고 치밀한 서사를 들여다봐야 한다. 극은 학창 시절 가해자와 피해자로 얽혔던 두 동창, 카알라와 헤더가 20년 만에 한 카페에서 재회하며 시작된다. 교양 있고 부유한 헤더와, 삶의 풍파를 정통으로 맞아 거칠어진 임산부 카알라. 완벽한 대척점에 선 두 사람의 만남은 헤더가 “거액을 줄 테니 내 남편을 죽여달라”는 충격적인 청부 살인을 제안하며 기묘한 심리전으로 치닫는다.
권유리는 삶에 찌든 카알라의 무거운 발걸음과, 속물적이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처절한 생존 본능을 날 것 그대로 쏟아낸다. 거액의 제안 앞에서 흔들리는 눈빛, 헤더의 도발에 맞받아치는 날 선 방어기제,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는 과거의 진실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내면까지. 자칫 과장될 수 있는 설정 속에서도 오히려 힘을 뺀 연기로 인물의 곪은 상처를 관객에게 툭툭 던진다. 단 두 명의 배우가 주고받는 호흡만으로 극의 긴장감을 쥐락펴락하며 무대를 완벽하게 장악한다.
아이돌 출신이라는 꼬리표나 미디어에 노출된 고정된 이미지가 더 이상 권유리를 가둘 수 없음을 선언하는 작품이다. 자신에게 기대하는 대중의 시선을 기분 좋게 배반하며, 온전한 배우의 얼굴로 다시 무대에 오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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