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 '김일성 별장'에 깃든 외국인 선교사의 혼
지난 9일 강원도 고성의 화진포 해변에 있는 ‘김일성 별장’을 찾았다.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김정석 목사)이 주관한 ‘기독교 근대문화유산 탐방’의 일환이었다. 김일성 별장과 기독교 근대문화유산이 무슨 상관일까. 그 별장은 원래 외국인 선교사 로제타 홀 가족이 지은 여름철 휴양소였다. 1940년 전후 선교사들이 강제 추방된 이후 한국전쟁 전까지 김일성 일가가 별장으로 사용했다 하여 ‘김일성 별장’으로도 불린다.

김일성 별장으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화진포 셔우드 홀 문화공간’이 세워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구한말 조선 땅을 찾은 최초의 서양인 여의사이자 선교사였던 로제타 홀(1865~1951) 가족의 생애가 뭉클한 감동과 함께 숨 쉬고 있었다.
◇선교지에서 남편과 딸 잃어=구한말이었다. 병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조선의 아낙네들은 서양인 의사의 진료를 거부했다. 외간 남자에게 몸을 보일 수 없다는 유교적 사고가 강했다. 서양 선교사들은 급히 본국에 도움을 청했다.
당시 로제타는 25세였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의 병원에서 실습 중이었다. 약혼자도 있었다. 그런데 미국 북감리교로부터 조선 의료 선교 제안을 받았다. 로제타는 기꺼이 수락했다. 결혼까지 접을 생각이었다. 이 사실을 안 약혼자 윌리엄 제임스 홀은 로제타를 포기하지 않았다. 의사였던 그는 로제타와 함께 조선 의료 선교를 함께 떠났다.

1890년 조선 땅을 밟은 뒤 두 사람은 결혼했다. 4년 후 청일 전쟁이 발발했다. 청나라군과 일본군의 대대적인 전투가 평양에서 벌어졌다. 평양성에서 청나라군은 싸웠으나 대패했다. 당시 평양성 안에 방치된 수많은 시신으로 인해, 평양 전역에 전염병인 발진티푸스가 창궐했다.
평양에 있던 로제타의 남편은 전쟁에서 다친 부상병들과 전염병 환자들을 치료했다. 그러다가 자신도 발진티푸스에 걸리고 말았다. 결국 윌리엄 제임스 홀은 세상을 떠났다. 당시 로제타는 둘째 아이를 가져 임신 7개월이었다. 첫아들은 고작 한 살이었다. 그러니 절망감이 오죽했을까.
남편을 잃은 충격과 슬픔 속에서 로제타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출산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듬해 유복자인 딸을 낳았다. 처음 선교할 때 로제타는 “아무도 가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2년 뒤, 결국 그녀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1898년에는 어린 딸(3살)마저 풍토병(이질)으로 죽었다. 조선 땅에서 남편과 딸을 모두 잃은 로제타 홀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일기에 남겼다. “나의 이 뼈아픈 고통이 자식을 잃은 수많은 조선 어머니들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병든 자들을 더 뜨겁게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그랬다. 로제타 홀은 남편 없이 낳은 딸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절망마저 자신의 십자가로 삼았다. 그리고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로제타의 고백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했던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를 고스란히 관통한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 양성=서울 정동에 세워진 여성전용 병원 ‘보구여관(普救女館)’에서 로제타 홀은 진료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선인들 사이에 괴소문이 돌았다. “서양 의사들이 아이들의 눈을 빼서 약으로 쓴다”라거나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등 서양 의술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었다. 그걸 두려워하지 않는 14살 총명한 소녀가 있었다. 이화학당에 다니는 김점동이었다.
영어를 조금 배운 그녀는 통역과 진료 보조를 맡아 로제타를 도왔다. 특히 피가 낭자한 수술실은 조선인 보조원들조차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런데 김점동은 수술실에서도 자리를 지키며 침착하게 로제타를 도왔다.


“조선 여성의 병은 조선 여성이 고쳐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던 로제타 홀은 김점동의 미국 유학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다. 나중에 결혼해서 박 에스더로 불린 김점동은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조선인 최초의 서양의학 여의사가 됐다. 고국으로 돌아온 박 에스더(김점동)는 조선의 여성 환자들을 밤낮으로 돌보았다.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1년에 무려 3000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그러다가 과로와 폐결핵으로 1910년 세상을 떠났다. 고작 34세의 나이였다.
탐방에 동행한 홍승표 목사는 “로제타 홀은 단순히 의료 봉사에 그치지 않고, 그 당시에 조선 여성이 주체적으로 여성 의료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한 점이 놀랍다”고 말했다.
남편과 딸을 잃은 로제타 홀에게는 아들만 하나 있었다. 셔우드 홀(1893~1991)이다. 친이모처럼 정겹게 지내던 박 에스더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셔우드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꼭 결핵의 공포를 이겨내겠다’고 다짐했다. 나중에 의대에 간 셔우드는 결핵 전문의가 됐다. 그리고 부모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 의료 선교를 펼쳤다. 결핵 환자를 위한 한국 최초의 요양소를 설치하고, 크리스마스 씰도 처음으로 발행했다.

김정석 한교총 대표회장은 “당시만 해도 조선에서 여성이 의사가 되는 건 꿈도 못 꿀 때였다”며 “로제타 홀은 경성여자의학강습소(고려대 의과대학의 전신)를 설립해 한국인 여의사를 양성했다”고 말했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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