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잎 갉아먹은 벌레 때문에... 최고급 우롱차의 탄생 일화

노시은 2026. 3. 15.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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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과 브루헐의 그림과 차 '동방미인'... 근사한 무언가를 완성하는 디테일에 대하여

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 <기자말>

[노시은 기자]

 박연폭포 종이에 수묵, 119.5×52㎝, 개인 소장
ⓒ 노시은촬영
A4 크기로만 봐왔던 '박연폭포'가 실제 크기로 눈앞에 나타나자, 이윽고 시원한 물줄기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책 속의 박연폭포가 내는 소리는 한쪽에서만 들리는 모노사운드였다면, 실제 그림에서 나오는 소리는 돌비사운드 그 자체였죠.

박연폭포는 개성 대흥산성 밖에 있는 폭포로, 정선은 눈에 보이는 실제의 척도보다 마음속에 와닿은 웅장함을 화면에 꽉 차게 과장하여 폭발시키듯 그려내 명작으로 탄생시켰습니다. '이래서 그림은 반드시 실제로 만나야 하는 거구나' 싶었습니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님의 뜨거웠던 강연(10일 오후 2시 <겸재 정선의 삶과 예술>)을 들은 뒤라 더 깊은 감동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어요. 분명 책으로 읽은 뒤에 듣는 이야기인데도 훨씬 생동감 있고 재미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정선의 삶과 작품을 압축해서 다룬 두 시간 중에 저에게 강렬하게 남은 그림은 두 점이었어요. '박연폭포'와 '옹천'이었죠.

정선의 옹천과 브뤼헐의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
 정선, 《신묘년 풍악도첩》 중 <옹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공공누리
아찔한 절벽이 독 안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벼랑길, '옹천'입니다. 금강산 유람 여정이라는 것은 같지만, 먼저 접해서 익숙했던 <해악전신첩>에는 없는 36세의 젊은 겸재의 <신묘년 풍악도첩> 속의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이 유독 맘에 남은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어요.

"그림을 그렇게 싱겁게 보면 어떡합니까? 저 벼랑 끄트머리를 도는 나귀 뒷다리하고 꽁지를 한번 보세요."

맘에 드는 예쁜 여성에게 이 그림을 보며 건넨 저 말이 둘을 사랑으로 이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화면 구석으로 슬쩍 사라지는 그 나귀의 뒷다리와 꼬리를 보는 순간, 제 머릿속에 전혀 다른 서양화 한 점이 벼락처럼 스쳤죠.
 Landscape with the Fall of Icarus, Pieter Brueghel the Elder (1526/1530?1569), Royal Museums of Fine Arts of Belgium 소장
ⓒ public domain
바로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 속, 바다에 거꾸로 처박혀 파닥거리는 이카루스의 두 다리였습니다.

동양의 진경산수화와 서양의 풍경화. 그려진 시대도, 기법도, 화가의 국적도 다르지만 두 그림은 묘하게도 하나의 지점에서 강렬하게 조우하고 있었어요. 바로 압도적인 대자연 속에 삐죽이 튀어나온, 미미하지만 결정적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나귀의 다리와 인간의 다리라는, '디테일'이란 점이죠.

먼저 브뤼헐의 그림을 떠올려 볼까요? 눈부신 태양이 빛나는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 농부는 묵묵히 밭을 갈고 양치기는 지팡이에 기대어 하늘을 봅니다. 무역선은 돛을 달고 순항 중이고요. 대자연과 인간의 일상은 아무런 문제 없이 평온하게 굴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람객의 시선이 화면 오른쪽 아래, 어두운 바다 구석으로 향하는 순간 이 평화로운 풍경은 지독한 아이러니로 돌변합니다.

태양 가까이 날아오르려다 밀랍 날개가 녹아 추락한 이카루스. 신화 속 위대한 비극의 주인공이 그곳에 거꾸로 처박혀 있습니다. 수면 위로 삐죽 튀어나온 두 다리 주변으로 아주 작은 물보라만이 일고 있을 뿐이죠. 농부도, 양치기도, 어부도 그의 비극적인 추락에 눈길조차 주지 않아요.

브뤼헐은 거대한 우주의 섭리 혹은 무심한 일상 앞에서, 한 개인의 찬란했던 비상과 비극적 추락이 얼마나 덧없고 미미한 해프닝에 불과한지를 그 작고 우스꽝스러운 '두 다리'를 통해 서늘하게 꼬집습니다.
 문제의 뒷다리와 꽁지는 정말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들여다봐야 발견할 수 있다!
ⓒ 노시은촬영
그 서늘한 유머를 안고 다시 겸재의 '옹천'으로 시선을 돌려봅니다. 화면의 절반 이상을 꽉 채운 깎아지른 절벽은 붓이 춤을 추듯 거칠고 먹빛이 짙습니다. 굽이치는 파도는 바위를 집어삼킬 듯 매섭죠. 브뤼헐의 바다가 무심하다면, 겸재의 절벽과 바다는 인간을 압도하는 웅장한 기세를 뿜어냅니다.

그런데 그 숨 막히는 대자연의 위용 속, 절벽을 따라 난 위태로운 길 모퉁이에 아주 작은 틈이 있습니다. 벼랑을 돌아 막 시야에서 사라지려는 나귀의 삐죽 튀어나온 뒷다리와 꼬리 하나. 그 작은 디테일 하나가 그림의 공기를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거대하고 준엄한 자연의 풍경이, 그 속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팍팍한 인간의 삶을 지나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번지게 하는 따뜻한 해학으로 치환되는 순간이죠.

명작의 조건, 명차의 조건
 정선의 그림에서 발견한 디테일과 닮은점이 많은 동방미인과, 박연폭포에 등장한 바위를 닮은 흑임자오메기떡을 찻자리에 모아봤다.
ⓒ 노시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지금 제 앞에 놓인 찻자리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네요. 둥근 접시 위에 무심하게 올려둔 검은 흑임자 오메기떡. 겉면에 투박하게 묻어난 검은깨 고물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박연폭포'의 거대한 물기둥이 내리꽂히는 폭포 아래의 육중하고 검은 바위가 겹쳐 보입니다.
 왼쪽에 보이는 검고 둥근 바위가 마치 흑임자 오메기떡과 같아 곁들이면 찰떡이라 생각하며 그림속 선비들은 무슨 말을 주고받았을지 궁금해졌다. 손을 들고 상대방을 바라보는 선비는 분명 가이드일 것이고, 시동이 따라온 선비는 손님일 것 같은데.....
ⓒ 노시은촬영
 그림에서 착안해서 찰떡궁합을 기대했는데, 동방미인에 곁들이니 흑임자의 향기가 강렬하게 훅 올라와서 호불호가 있을 것 같은 맛이었다. 하지만 그 첫 관문을 지나면 부드럽게 올라오는 쑥향과 찰떡의 쫄깃함, 팥소의 달콤함과 동방미인이 제법 잘 어우러져 맛있었다.
ⓒ 노시은
그 무게감을 덜어주는 것은 얇고 투명한 순백색의 백자 찻잔이에요. 잔 안에는 곱게 우려낸 대만차 동방미인이 담겨 있습니다. 폭포수 아래 웅덩이처럼 깊게 고인 호박색 차를 한 모금 머금어 봅니다. 달콤한 꿀 향과 짙은 머스캣 향이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네요.
 동방미인의 본명은 흰솜털이 달린 우롱차라고 해서 백호오룡이다. 오묘하게 다양한 빛깔의 찻잎이 내는 꿀의 향기와 맛이 기가 막히다.
ⓒ 노시은
재미있는 것은 이 동방미인이라는 최고급 우롱차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이 황홀한 향기는 '소록엽선'이라는 아주 작은 벌레가 찻잎을 갉아먹는 상처에서 시작돼요. 일반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그저 찻잎을 망쳐놓은 해충의 흔적에 불과했겠지만, 예리한 차농은 달랐습니다.

그 보잘것없는 상처라는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기가 막힌 향기를 찾아낸 것이죠. 그 아주 작은 벌레가 낸 상처, 그 미미한 디테일이 잎의 방어 기제를 작동시켜 세상 어디에도 없는 기가 막힌 풍미를 만들어낸다는 걸 알아본 겁니다.

어쩌면 명작의 조건도, 명차의 조건도 결국 상처 입은 잎사귀나 화면 구석의 다리 같은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들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동방미인은 한 김 식힌 85도 정도의 알맞은 온도와 물줄기로 살살 달래어가며 우려야만 미인의 진가를 드러내거든요. 절대 박연폭포처럼 콸콸 물을 부으면 안 됩니다. 성난 미인은 여러분에게 쓴 맛만을 남길 거예요.

A4 크기의 모노사운드로는 결코 들을 수 없었던 '박연폭포'의 돌비사운드, 그리고 그 압도적인 풍경 너머로 슬쩍 숨겨놓은 벼랑 끝 나귀의 꼬리와 뒷다리, 바다에 빠진 이카루스의 허우적대는 다리. 두 화가는 웅장한 대자연을 그려내면서도, 결국 그 거대한 세상 속에서 위태롭지만 우스꽝스럽게 묵묵히 살아가는 우리들의 작고 꼬물거리는 발자취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비워진 백자 찻잔에 다시 차를 따릅니다. 호박색 수면이 일렁이네요. 제 삶의 구석구석에 숨겨진 작고 우스꽝스럽고 사랑스러운 디테일이 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 노시은
"그림을 그렇게 싱겁게 보면 어떡합니까?"

관장님의 그 다정한 핀잔이 귓가를 맴돕니다. 그림의 진짜 이야기는, 그리고 삶의 진짜 묘미는 언제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구석진 디테일 속에 숨어 있죠. 차를 우려서 마시는 일도 그렇고요. 나귀의 뒷다리에서 평생의 인연을 알아본 유홍준 관장님처럼, 혹은 아주 작은 벌레의 상처에서 동방미인의 단맛을 찾아낸 차농들처럼요.

비워진 백자 찻잔에 다시 차를 따릅니다. 호박색 수면이 일렁이네요. 제 삶의 구석구석에 숨겨진 작고 우스꽝스럽고 사랑스러운 디테일이 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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