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잎 갉아먹은 벌레 때문에... 최고급 우롱차의 탄생 일화
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 <기자말>
[노시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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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연폭포 종이에 수묵, 119.5×52㎝, 개인 소장 |
| ⓒ 노시은촬영 |
박연폭포는 개성 대흥산성 밖에 있는 폭포로, 정선은 눈에 보이는 실제의 척도보다 마음속에 와닿은 웅장함을 화면에 꽉 차게 과장하여 폭발시키듯 그려내 명작으로 탄생시켰습니다. '이래서 그림은 반드시 실제로 만나야 하는 거구나' 싶었습니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님의 뜨거웠던 강연(10일 오후 2시 <겸재 정선의 삶과 예술>)을 들은 뒤라 더 깊은 감동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어요. 분명 책으로 읽은 뒤에 듣는 이야기인데도 훨씬 생동감 있고 재미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정선의 삶과 작품을 압축해서 다룬 두 시간 중에 저에게 강렬하게 남은 그림은 두 점이었어요. '박연폭포'와 '옹천'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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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선, 《신묘년 풍악도첩》 중 <옹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 ⓒ 공공누리 |
"그림을 그렇게 싱겁게 보면 어떡합니까? 저 벼랑 끄트머리를 도는 나귀 뒷다리하고 꽁지를 한번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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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andscape with the Fall of Icarus, Pieter Brueghel the Elder (1526/1530?1569), Royal Museums of Fine Arts of Belgium 소장 |
| ⓒ public domain |
동양의 진경산수화와 서양의 풍경화. 그려진 시대도, 기법도, 화가의 국적도 다르지만 두 그림은 묘하게도 하나의 지점에서 강렬하게 조우하고 있었어요. 바로 압도적인 대자연 속에 삐죽이 튀어나온, 미미하지만 결정적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나귀의 다리와 인간의 다리라는, '디테일'이란 점이죠.
먼저 브뤼헐의 그림을 떠올려 볼까요? 눈부신 태양이 빛나는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 농부는 묵묵히 밭을 갈고 양치기는 지팡이에 기대어 하늘을 봅니다. 무역선은 돛을 달고 순항 중이고요. 대자연과 인간의 일상은 아무런 문제 없이 평온하게 굴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람객의 시선이 화면 오른쪽 아래, 어두운 바다 구석으로 향하는 순간 이 평화로운 풍경은 지독한 아이러니로 돌변합니다.
태양 가까이 날아오르려다 밀랍 날개가 녹아 추락한 이카루스. 신화 속 위대한 비극의 주인공이 그곳에 거꾸로 처박혀 있습니다. 수면 위로 삐죽 튀어나온 두 다리 주변으로 아주 작은 물보라만이 일고 있을 뿐이죠. 농부도, 양치기도, 어부도 그의 비극적인 추락에 눈길조차 주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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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제의 뒷다리와 꽁지는 정말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들여다봐야 발견할 수 있다! |
| ⓒ 노시은촬영 |
그런데 그 숨 막히는 대자연의 위용 속, 절벽을 따라 난 위태로운 길 모퉁이에 아주 작은 틈이 있습니다. 벼랑을 돌아 막 시야에서 사라지려는 나귀의 삐죽 튀어나온 뒷다리와 꼬리 하나. 그 작은 디테일 하나가 그림의 공기를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거대하고 준엄한 자연의 풍경이, 그 속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팍팍한 인간의 삶을 지나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번지게 하는 따뜻한 해학으로 치환되는 순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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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선의 그림에서 발견한 디테일과 닮은점이 많은 동방미인과, 박연폭포에 등장한 바위를 닮은 흑임자오메기떡을 찻자리에 모아봤다. |
| ⓒ 노시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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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에 보이는 검고 둥근 바위가 마치 흑임자 오메기떡과 같아 곁들이면 찰떡이라 생각하며 그림속 선비들은 무슨 말을 주고받았을지 궁금해졌다. 손을 들고 상대방을 바라보는 선비는 분명 가이드일 것이고, 시동이 따라온 선비는 손님일 것 같은데..... |
| ⓒ 노시은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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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에서 착안해서 찰떡궁합을 기대했는데, 동방미인에 곁들이니 흑임자의 향기가 강렬하게 훅 올라와서 호불호가 있을 것 같은 맛이었다. 하지만 그 첫 관문을 지나면 부드럽게 올라오는 쑥향과 찰떡의 쫄깃함, 팥소의 달콤함과 동방미인이 제법 잘 어우러져 맛있었다. |
| ⓒ 노시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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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방미인의 본명은 흰솜털이 달린 우롱차라고 해서 백호오룡이다. 오묘하게 다양한 빛깔의 찻잎이 내는 꿀의 향기와 맛이 기가 막히다. |
| ⓒ 노시은 |
그 보잘것없는 상처라는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기가 막힌 향기를 찾아낸 것이죠. 그 아주 작은 벌레가 낸 상처, 그 미미한 디테일이 잎의 방어 기제를 작동시켜 세상 어디에도 없는 기가 막힌 풍미를 만들어낸다는 걸 알아본 겁니다.
어쩌면 명작의 조건도, 명차의 조건도 결국 상처 입은 잎사귀나 화면 구석의 다리 같은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들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동방미인은 한 김 식힌 85도 정도의 알맞은 온도와 물줄기로 살살 달래어가며 우려야만 미인의 진가를 드러내거든요. 절대 박연폭포처럼 콸콸 물을 부으면 안 됩니다. 성난 미인은 여러분에게 쓴 맛만을 남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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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워진 백자 찻잔에 다시 차를 따릅니다. 호박색 수면이 일렁이네요. 제 삶의 구석구석에 숨겨진 작고 우스꽝스럽고 사랑스러운 디테일이 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
| ⓒ 노시은 |
관장님의 그 다정한 핀잔이 귓가를 맴돕니다. 그림의 진짜 이야기는, 그리고 삶의 진짜 묘미는 언제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구석진 디테일 속에 숨어 있죠. 차를 우려서 마시는 일도 그렇고요. 나귀의 뒷다리에서 평생의 인연을 알아본 유홍준 관장님처럼, 혹은 아주 작은 벌레의 상처에서 동방미인의 단맛을 찾아낸 차농들처럼요.
비워진 백자 찻잔에 다시 차를 따릅니다. 호박색 수면이 일렁이네요. 제 삶의 구석구석에 숨겨진 작고 우스꽝스럽고 사랑스러운 디테일이 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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