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철학자의 초상화에 이런 뜻이... 알고 보면 더 흥미롭다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인문학을 친근한 미술작품을 통해 새롭게 조명합니다. 작품 속에 숨겨진 시대정신과 작가의 문제의식을 살피고 이를 동서양 고전으로 심화해 독자의 예술적 감수성을 높이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특별한 여정이 될 것입니다. <기자말>
[박홍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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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드바르 뭉크 <니체의 초상> 1906년 |
| ⓒ 퍼블릭 도메인 |
하지만 인물을 둘러싼 다른 요소들을 살피면 화가가 이 그림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문제의식과 만날 수 있다. 주변의 사물이 굴절된 모습으로 휘청거린다. 땅도 하늘도 온통 휘어져 꿈틀대며 불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뭉크의 대표작이라 할 <절규>의 배경과 상당히 비슷한 분위기다.
노란색·파란색·붉은색·갈색·검은색 등 거의 원색에 가까운 색들이 기본적인 배색의 조화에서 벗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뒤섞여 어지러운 느낌을 주는 점도 비슷하다. 니체가 서 있는 곳도 마찬가지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높은 다리 위다.
경계에 선 인간을 그리다
니체는 다리에 멈춰 서서 난간 아래를 응시한다. 세상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엉켜서 너울거리고 있으니 여기에서 살아가는 사람인들 어찌 고정된 상태나 단일한 정체성을 확고하게 유지할 수 있으랴. 인간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하나의 답이 있을 리 만무하다.
인간은 본성이라는 견고한 뼈대를 세울 수 없는, 늘 불안하고 유동적인 존재임을 나타내려는 듯하다. 다리 위의 니체처럼 인간은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혼돈의 상황 속에서, 이쪽과 저쪽 사이의 다리에 서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려는 게 아닐까? 늘 경계에 서서 불안을 숙명으로 안고 살아가는 존재 말이다.
뭉크는 니체와 만나 직접 교류하지는 않았지만, 니체의 사상에 상당 부분 공감하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단순히 둘 다 어릴 때부터 가족의 죽음과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다는 현상적인 공통점에 머물지 않는다. 뭉크는 당대의 문학적·철학적 경향에 깊은 관심을 두고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실존주의 철학의 출발점이 되는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을 곁에 두고 여러 차례 읽었다고 한다. 일기에 그의 문장이 곳곳에 인용되어 있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불안·허무 등을 깊이 탐구한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주요 저작을 읽고 여기에서 얻은 영감을 미술 작품에 반영하기도 했다. 뭉크의 <불안>도 그 일환이다. 그림에서 니체가 서 있는 다리 난간이 보인다.
마찬가지로 주위의 풍경과 사물이 서로 뒤섞여 안정을 잃고 있다. 사람들의 눈은 하나같이 초점이 분명하지 않고 표정도 흐려져 있다. 같은 분위기의 사람들이 뒤로 끝없이 이어져서, 경계에 서서 불안을 운명처럼 끌어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을 드러낸다.
뭉크는 니체의 철학에 공감을 품고 있던 화가였기에, 니체 여동생이 독일 라이프치히 극장에서 열리는 니체 관련 연극의 무대 장식을 요청했을 때 흔쾌히 맡았다. 이즈음 두 점의 니체 초상화를 그렸는데 위의 작품은 그중의 하나다. 니체를 상징하는 개념인 '초인'의 굳은 의지와 당당함보다는 경계에 서서 불안을 떠안고 흔들리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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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드바르 뭉크 <불안> 1894년 |
| ⓒ 퍼블릭 도메인 |
실제로 니체는 인간의 본질과 본성을 단일하고 합리적인 정체성에서 찾았던 기존 철학을 뒤집어엎고자 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간 본성 논의에서 지배적인 견해는 성악설이었다. 왜 많은 사상가가 악한 본성에 주목했을까? 조금 더 들어가 의문을 품자면, 왜 본성을 자꾸 탐구하고자 했을까?
누가 본성을 주로 거론했는지를 살펴보면 본성론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를 의외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주로 성악설을 주장하는 쪽에서 본성 문제를 끄집어냈다. 왜 그런 경향이 나타났을까?
마키아벨리에게서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군주론>에서 인간을 이기적이고 위험한 존재로 규정한 후에 이를 근거로 특정한 결론을 끌어낸다. 만약 통치자가 사람들을 선하게 대하면 "무자비한 자들에게 둘러싸여 몰락을 자초"하게 된다. 인간의 사악한 이기심 때문에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나아가 권력도 무너진다.
그러므로 통치자가 권력을 유지하려면 부도덕하게 행동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거짓말도 하고, 비록 잔혹하다는 평가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강력한 처벌로 통제해야 한다. 인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주저하는데,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로써 유지"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의 고유한 결론이 아니다. 악한 본성을 주장한 사상가 대부분이 권위적인 통치의 필요성으로 연결한다. 성악설이 폭넓게 유행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구성원에 대한 권위적 통제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악하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인간이 자유롭게 행위를 하도록 두면 사회가 무너지기에, 사회와 개인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통치자의 강력한 지배가 필요하다는 논리적 장치를 가져온 것이다. 권위적 통치를 추구하는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했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도 인간 본성론의 이러한 특징을 간파했던 듯하다. 서구의 전통적인 가치를 부수려 했기에 '망치를 든 철학자'로 불렸다. 그가 깨려 한 전통은 천 년이 넘도록 서양을 지배한 기독교 세계관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모든 권위를 국가 권력에 부여하는 국가주의적 사고방식도 포함된다. 인간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논리를 비판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밝힌 다음 내용도 그 일환이다.
"국가는 선악에 관한 온갖 말을 동원하여 속인다. 국가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거짓말이다. 또한 국가가 무엇을 갖고 있든 그것은 훔친 것이다. 국가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허위다. (…) 선과 악에 대한 말의 혼란, 나는 그대들에게 이것이 국가의 표지라고 말한다."
니체, 선과 악은 말의 혼란이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니체에 의하면 국가는 끊임없이 선과 악의 잣대를 개인에게 들이댄다. 물론 나라마다 선악을 표현하는 말은 다르다. 그 말로 지칭하는 행위도 일정한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최대한 많은 해당 사항을 만들어 관습이나 법으로 강제한다. 시대가 변하면 일부 항목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다. 그러면 국가는 다시 새롭게 선과 악의 항목을 만들어낸다.
니체는 나라에 따른 차이와 시대에 따른 변화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선악을 통해 규정하는 내용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한다. 국가는 선과 악이 인간이 이 세상에 생긴 이후 줄곧 보편적인 성격을 지닌 구분이라고 하지만 이말 자체가 거짓말이다. 국가가 국민을 지배하는 데 방해가 되는 사고방식과 행위에 악이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반대로 통치에 유리하거나 지배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에 선이라는 표지를 달았을 뿐이다.
국가는 훔치는 행위를 대표적인 악이라고 규정하지만, 사실 국가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많은 재물을 훔쳤다. 부강한 나라일수록 주위 집단이나 국가를 침략하여 약탈한 부를 국력의 토대로 삼았다. 상대 국민을 더 많이 죽이고 더 많은 재산을 약탈한 장수일수록 국가 영웅으로 추켜세웠다.
현대사회에서 선진국 지위에 있는 대부분 국가는 과거 식민지 약탈로 그 자리에 올랐다. 역사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지배 세력의 부도 마찬가지다. 신분제 사회에서 귀족은 백성의 토지와 노동력을 강탈하여 부를 축적했다.
결국 선악 규정은 실체가 없는 '말의 혼란'에 가깝다. 국가와 지배 세력이 자기의 이해관계에 맞게 만들었을 뿐이다. 선과 악을 구분함으로써 국가는 비로소 지배력을 확보한다. 선악 구분은 국가 지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국가의 표지'다. 사정이 이러하니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가 허망하고 불순한 일이다.
니체가 보기에 인간은 하나의 상태나 경향으로 규정할 수 있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 심연 위에 놓인 밧줄이다. (…) 인간의 위대함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닌 데 있다." 동물은 맹목적이고 폭력적인 상태다. 초인은 이를 넘어서는 도덕적이고 가치 지향적인 인간이다. 그 둘 사이에 있는 밧줄, 경계에서 두 가지를 모두 지닌 존재가 인간이다.
니체의 주장처럼 강제로 씌워진 선악 가면을 벗고 인간에 접근해야 비로소 유용하고 미래 지향적인 태도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최소한 상반되고 충돌하는 지킬과 하이드의 요소, 혹은 도벽 환자와 선한 원시인의 요소를 동시에 발견하고, 이를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인정하고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건강한 견해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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